/일러스트=김의균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투자자들이 물가연동형 자산에 돈을 쏟아붓고 있다.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6.8% 상승해 1982년(7.1%) 이후 39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로존의 11월 물가상승률도 4.9%를 기록해 통계 집계가 시작된 1997년 이후 가장 높았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내년 기준금리를 세 차례 인상할 가능성을 시사했고,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이달 주요국 중앙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이 같은 중앙은행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인 글로벌 공급망 병목 현상이 단기간 내 해소되기 어려울 것이라 전망한다. 자산운용사 뱅가드의 로저 알리가 디아즈 선임 경제학자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수급 불균형이 해소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내년에도 인플레이션은 연준의 목표치(2%)를 훨씬 상회할 것이라 예상한다”고 했다. 투자자들 역시 인플레이션 장기화에 대비할 수 있는 자산을 사들이고 있다. 블룸버그는 “올 들어 이름에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있는 모든 ETF(상장지수펀드)에 자금 순유입이 일어나고 있다”며 “투자자들이 이처럼 일방적인 확신을 드러내는 건 보기 드문 일”이라고 했다.

◇TIPS·원자재·리츠에 몰리는 돈

인플레이션으로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는 자산은 ‘미국 물가연동채권(TIPS·Treasury Inflation Protected Securities)’이다. TIPS는 투자 원금에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이다. 예를 들어 액면가 1000달러로 발행된 TIPS를 매입하고, 향후 6개월 동안 소비자물가지수(CPI)가 1% 상승하면 채권 원금의 가치는 1010달러로 상승하게 된다. 이 원금에 기초해 이자를 지급하기 때문에 이자 지급액도 함께 늘어난다.

데이터 제공 업체 EPFR글로벌에 따르면, TIPS를 보유하고 있는 펀드로 올해 702억달러(약 83조3000억원)가 순유입됐다. 지난해 순유입액(244억달러)의 세 배 가까운 규모로, EPFR이 집계를 시작한 2004년 이후 가장 많은 액수다. TIPS ETF 중 가장 큰 블랙록의 ‘아이셰어즈 TIPS 채권 ETF(TIP)’에는 올 들어 112억달러(약 13조2910억원)가 유입됐고, 수익률은 4.7%를 기록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에릭 발추나스 선임 분석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인플레이션을 목격하고 있고, 연준의 ‘일시적’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며 “채권에 투자하기 좋지 않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TIPS 펀드는 최고의 성과를 내고 있다”고 했다.

원자재⋅부동산 등 실물 자산도 인플레이션 헤지(hedge·위험 회피) 목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대표적인 원자재 ETF인 ‘인베스코 원자재 파생상품 ETF(PDBC)’에는 올해 1~11월 24억달러(약 2조8480억원)가 유입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유입액(9억6400만달러)의 두 배를 넘는다. PDBC는 에너지와 산업용 금속, 귀금속, 농산물 등 14종목에 투자하는 액티브 ETF다. 올해 수익률은 38.6%로, S&P 500 수익률(25.5%)을 월등히 앞섰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으로 최악의 한 해를 겪었던 리츠(REITs·부동산투자신탁)도 부활했다. 미국 최대 리츠 ETF인 ‘뱅가드 부동산 ETF(VNQ)’는 2020년 한 해 동안 20억달러(약 2조3770억원)가 순유출됐으나, 올해는 현재까지 65억달러(약 7조7250억원)가 순유입됐다. 금융 컨설팅사 CFE파이낸셜의 마르코 리마사 창업자는 CNBC에 “물가가 오르면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가 오르고, 그 수익이 투자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리츠는 물가상승기에 잘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인플레 피난처 명성 잃은 ‘금(金)’

반면 전통적인 인플레이션 피난처로 여겨졌던 금은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지난해 팬데믹으로 세계경제가 둔화됐을 때만 해도 금값은 온스당 2000달러를 넘어서며 안전자산으로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올해는 각국 물가가 유례 없이 가파르게 오르는데도 금값은 반대로 움직였다. 올해 초 온스당 1966달러를 기록했던 금 선물 가격은 30일 현재 1805달러 수준으로 8% 하락했다. 세계 최대 금 ETF인 ‘SPDR 골드 셰어즈(GLD)’에서는 올 한 해 107억달러(약 12조7220억원)가 빠져나갔다.

금값 하락의 원인으로는 달러 강세가 꼽힌다. 통상 금 가격은 달러 가치와 반비례한다. 달러가 약세를 보이면 현물인 금의 화폐가치가 높아지면서 금값이 상승하고, 달러가 강세를 나타내면 반대로 금값이 떨어진다. 투자회사 래퍼 텡글러의 낸시 텡글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CNBC에 “올해 인플레이션 헤지 수요는 부동산이나 리츠, 주식 등 다른 부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며 “향후 달러가 약세를 나타낸다면 금값이 움직일 수 있겠지만, 탈탄소화 트렌드 때문에 금 대신 다른 금속이 대안으로 떠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새로운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부상한 비트코인 역시 금값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트코인 가격은 올 들어 59% 상승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프란시스코 블랜치 전략가는 FT에 “기관 투자자의 디지털 자산 보유가 지난 1년 반 동안 전반적으로 증가했다”며 “예전 같으면 금으로 갔어야 할 자금 흐름이 가상화폐로 넘어갔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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