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MS)의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는 IT 산업 역사상 최고액 규모(687억달러·약 82조원)의 인수·합병으로 화제가 됐지만, 메타버스(3차원 가상 세계) 시장 선점을 위해 게임사 인수에 혈안이 돼 있던 MS 처지에선 ‘헐값’이나 다름없었다. 지난해 7월 이전까지만 해도 90달러 이상이던 액티비전 블리자드 주가가 폭락을 거듭해 인수를 제안한 시점인 12월엔 50달러대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800억달러 넘던 몸값(시가총액)도 450억달러까지 쪼그라들었다.
주가 하락의 결정적 계기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 소리를 들으며 블리자드를 집어삼킨 사내 성폭력 사태다. 블리자드는 작년 7월 사내에 만연한 성폭력 및 성차별 문제와, 회사가 이를 알고도 방치했다는 혐의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州)정부에서 고소당해 소송이 진행 중이다.
고소장에 담긴 사내 성폭력 사례는 그만큼 충격적이다. 예컨대 출장지에서 상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직후 자살한 여직원의 나체 사진을 사내 파티에서 직원들끼리 돌려보는가 하면, 상사에게 사무실에서 성폭행당했다는 여직원의 신고를 회사 측에서 묵살하고 가해자는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이후 블리자드에 보고된 관련 문제만 무려 700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블리자드뿐 아니라 작년 한 해 여러 테크 기업에서 사내 성폭력 문제가 동시다발로 터져 나왔다. 블리자드를 인수하는 MS는 지난 5월 창업주 빌 게이츠가 과거 사내 불륜을 비롯, 회사 여직원들에게 만남을 요구하는 등 부적절한 행동으로 회사의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홍역을 치렀다. 스페이스X와 블루오리진,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에서도 성폭행 또는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직원들의 폭로가 이어졌다.
국내에선 작년 10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국내 대표 게임사 엔씨소프트의 사내 성희롱 폭로 글이 올라와 논란을 일으켰다. 특정 부서 직원들의 잦은 성희롱 문제로 여직원들의 퇴사가 이어지는데도 사측에선 알면서 방관한다는 내용이었다. 엔씨소프트는 폭로가 나오고 한달 뒤 관련자들을 징계했다.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를 자랑하는 테크 기업들이 사내 성폭력의 온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남성이 지배하는 기술 산업
미국의 대표적 기술 및 스타트업 분야 여성 네트워크 조직인 우먼 후 테크(Women Who Tech)가 지난 2020년 기술 분야 여성 종사자 69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48%가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이 중 43%는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기술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5명 중 1명이 성희롱을 당했다는 뜻이다.
테크 기업 내 사내 성폭력 문제가 근절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남성 중심의 인적 구조가 꼽힌다. 시장조사 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전 세계 소프트웨어 개발자(프로그래머) 직군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91.67%(2021년 기준)에 달한다. 남성이 지배하는 산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IT 업계에서 여성 CEO 비율은 3%에 불과하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직장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로펌 데이비드 예레미안&어소시에이츠는 “기술 산업은 금융 및 에너지와 더불어 남성이 지배하는 분야”라며 “기술 분야 여성들은 승진, 임금 인상 등을 대가로 요구한 성관계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거나 낮은 인사 고과를 받았다”고 지적한다. 블리자드를 고소한 캘리포니아주 공정고용주택국(DFEH) 역시 소장에서 “2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 블리자드가 보수와 직무 배정, 승진, 해고 등 고용 조건에서 여성 직원을 차별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회사가 “프랫 보이(frat boy) 문화를 조장했다”고 밝혔다. 프랫 보이는 남성성이 강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남자 대학생을 뜻하는 말이다.
◇사내 성폭력 해결, 주주들이 나섰다
테크 기업 대부분이 무(無)노조 경영을 고수하는 것도 사내 성폭력 문제를 곪게 하는 요인이다. 사법 기관을 제외하면 사내 성폭력 피해자가 기댈 곳이 경영진과 인사 부서밖에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통상 사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거나 공론화하기보단 없던 일로 만들려는 경향이 강하기 마련이다. 실제 블리자드를 비롯해 논란이 된 기업은 모두 피해자가 회사에 피해 사실을 보고했음에도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난 12월 직접 겪은 성추행 피해와 회사의 외면을 폭로한 스페이스X 여성 엔지니어 출신 애슐리 코삭은 “직접 겪거나 목격한 성추행 피해를 직속 상사와 인사 부서에 신고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선 이미 사내 성폭력 문제를 계기로 노조가 설립된 사례가 있다. 작년 1월 빅테크 중 최초로 노조가 설립된 구글이다. 2018년 언론 보도를 통해 구글이 ‘안드로이드의 아버지’로 수석 부사장을 지낸 앤디 루빈 등 임원들의 성추행 사건을 은폐했고, 거액의 퇴직 보상금까지 챙겨준 사실이 알려지자 구글 직원 수천 명이 동맹 파업을 벌이며 결집해 결국 노조 설립을 이뤄냈다. 액티비전 블리자드에서도 ‘ABK 노동자 연합’이라는 근로자 조직이 만들어져 노조 설립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일부 기업에선 주주들이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MS가 대표적이다. 지난 13일 MS 이사회는 사내 성희롱 및 성차별 사례와 그 처리 결과를 전수조사한 보고서를 올 봄 공개하겠다는 이례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보고서엔 빌 게이츠의 사내 불륜 관련 내용도 담긴다. MS가 회사의 치부를 드러낼 보고서를 굳이 공개하는 것은 작년 11월 진행된 주주 투표 결과 때문이다. 빌 게이츠의 사내 불륜 및 성희롱 의혹이 터지자 주요 주주인 아르주나 캐피털 등이 공개 보고서에 대한 투표를 제안했다. 회사 측은 동분서주하며 주주들에게 제안을 부결해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투표 참여 주주의 78%가 찬성표를 던졌다. 투표를 제안한 주주들은 성명서에서 “주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선 직원들이 괴롭힘과 차별을 당하지 않게 보호하는 동시에, 책임감 있고 투명한 사내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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