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주요 산유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요동치며 유가(油價)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지난달에만 20% 넘게 급등한 국제 유가는 이달 초 7년 4개월 만에 배럴당 90달러를 돌파해 어느덧 100달러 선을 위협하고 있다. 수급 불균형에 외교·안보 문제까지 난마(亂麻)처럼 얽힌 탓에 사상 세 번째 초(超)고유가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치솟는 유가, 100달러 턱밑까지

2020년 상반기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급락했던 국제 유가는 백신 개발과 경제활동 재개에 힘입어 2020년 하반기 이후 꾸준히 오름세를 보였다. 특히 상승세가 가팔라진 건 작년 말부터다. 국제 유가의 기준이 되는 북해산 브렌트유와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작년 12월 이후 두 달 반 만에 모두 30% 넘게 올라 90달러대에 진입했다. 브렌트유와 WTI 가격이 90달러를 넘은 것은 2014년 10월 이후 7년 4개월 만이다.

국제 유가는 2008년 130달러대를 찍은 것이 역대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다. 미국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달러 약세, 중동 정세 불안, 중국·인도의 고속 성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한동안 주춤했던 국제 유가는 신흥국 수요 증가와 산유국의 증산(增産) 경계 등 영향으로 다시 급등해 2011~2014년 100~120달러대 고유가 흐름이 이어졌다.

유가가 조만간 100달러대에 진입해 가격이 세 자릿수를 유지한다면 2008년과 2011~2014년에 이어 사상 세 번째로 ‘초고유가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미국 굴지의 석유 회사 셰브론의 마이크 워스 CEO(최고경영자)는 최근 “원유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는 가운데 공급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시장에 반영된 것”이라며 “조만간 100달러 시대를 보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말했다.

◇원유에 목마른 시장

최근 유가 급등 배경은 수요와 공급으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수요 측면을 보면 2020년 하반기부터 코로나 공포에서 벗어나면서 경제활동이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6~9개월 뒤 경기 흐름을 예측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경기 선행 지수는 2019년 말 99.0(회원국 전체 기준)에서 2020년 4월 91.5까지 떨어졌다가 ‘V 자’로 반등하며 지난달에는 100.5까지 상승했다. 문 닫았던 공장들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고, 각종 교통수단이 바삐 움직이는 데다 대면(對面) 서비스가 활기를 찾으면서 원유 주문이 급격히 늘어난 상태다.

시장조사 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전 세계 하루 원유 수요는 2020년 9%가량 감소(9970만→9100만 배럴)했다가 작년에는 6% 증가했다. 올해 예상 수요도 작년보다 3% 늘어난 9940만배럴로 코로나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할 것으로 보인다. 올겨울 들어 이상 한파까지 몰아치며 난방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도 유가 상승에 영향을 줬다.

반면 공급은 가파르게 늘어난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원유 산업의 구조적 변화, 강대국 간 패권 다툼에 따른 지정학적 위기 때문이다. 석유 기업들은 팬데믹 전부터 친환경 기세에 눌려 원유 채굴과 관련된 자산을 매각하고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기업 체질을 바꿔왔다.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글로벌 석유 기업들의 신재생에너지 투자액은 2018년 22억8000만달러(약 2조7300억원)에서 2020년 37억1000만달러(약 4조4500억원)로 2년 만에 63% 늘었다. 반면 팬데믹 이전 5년간(2016~2020년) 글로벌 석유 기업들의 기존 자산 매각 건수는 매입 건수 대비 2배가량 많았다. 화석 연료에 대한 비난 여론 때문에 가뜩이나 원유 생산에 눈치를 보던 기업들은 팬데믹이 닥치며 수요가 급감하자 시설 투자를 대폭 줄였고, 이로 인해 원유 생산을 갑자기 크게 늘릴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여기에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군사적 긴장 확대, 예멘 반군의 UAE 석유 시설 공격 등 지정학적 위기가 유가 상승세에 기름을 부었다. 러시아와 UAE는 각각 전 세계 2위, 5위 원유 수출국이며, 두 나라의 원유 수출 비율은 전 세계의 5분의 1가량을 차지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 특히 러시아는 경제·안보 영역에서 압력을 가하는 서방세계에 맞서 원유를 무기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어 사태 해결이 쉽지 않다.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는 “러시아 국부 펀드는 고유가로 작년 엄청난 이익을 냈고, 국가 부채도 감소했다”며 “고유가는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를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느긋한 러시아와 대조적으로 미국과 유럽 등 서방세계는 인플레이션에 고유가까지 겹치며 비상이 걸렸다.

미국 캘리포니아 산페드로 인근에서 셰일 오일을 생산하는 모습.

◇高유가 이어질 듯… 최대 변수는 셰일

수요가 넘치는 데다 산유국이 당장 생산을 크게 늘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다 보니 유가는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JP모건의 나타샤 커니버 원자재 리서치 책임자는 “유가는 곧 배럴당 120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최대 변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부, 그리고 미국의 증산 규모다. 일각에서는 유가가 사상 최고치에 가까워진 데다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이 앞다퉈 원유 생산을 늘리고 있어 유가가 조만간 하락세로 돌아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유전 서비스 업체인 베이커휴즈에 따르면, 지난 7~13일 미국에서 가동 중인 석유 시추 장비는 516개로 2018년 2월 이후 4년 만에 가장 많았다. 미국 석유 기업인 엑손모빌과 셰브론도 최근 실적 발표에서 올해 산유량을 각각 25%, 10% 늘리겠다고 밝혔다. 블룸버그통신은 이에 대해 “미 셰일 산업이 다시 성장세로 돌아왔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씨티그룹은 올해 12월물 브렌트유 선물 가격이 하락하는 쪽에 베팅한 상태다. 미국 석유 기업인 코노코필립스의 라이언 랜스 CEO는 “올해 미국의 원유 생산량 증가 속도가 매우 우려스러울 정도”라며 공급 증가로 유가가 조만간 하락 압력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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