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포트폴리오에는 ‘FANG’이 있나요?”
2013년 9월 미국 경제 매체 CNBC 진행자 짐 크레이머가 방송에서 던진 이 질문에서 처음으로 ‘FANG(페이스북·아마존·넷플릭스·구글)’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크레이머는 이 네 기업을 ‘미래를 대표하고, 시장 지배적 지위를 가진 회사’라고 정의했다. 월가(街)는 여기에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하는 애플을 추가해 ‘FAANG’이라 불렀고, 현재까지 FAANG은 미국 성장주와 빅테크를 대표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2014년 출시된 미국 대표 기술 기업 지수에 ‘FANG 플러스(+)’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FANG+는 FAANG 기업을 포함해 미국 증시를 대표하는 10개 기술 기업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2020년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이 터진 뒤 FAANG 기업들의 주가는 고공 행진을 이어갔다. 비대면 사회로 전환하면서 광고 수요가 온라인으로 몰리고, 전자상거래·클라우드·온라인 구독 서비스 등 FAANG 기업의 핵심 사업 실적이 수직 상승했기 때문이다. 2020년 한 해 동안 FANG+ 지수는 93%나 올랐다. 2019년 S&P500 전체 시가총액에서 FAANG 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4.8%였으나, 2020년 말에는 19.2%로 뛰었다. 이렇게 한몸처럼 움직이며 미 증시의 엔진 역할을 해왔던 FAANG 회사들이 지난해 2분기부터 조금씩 따로 놀기 시작했다. 세계가 팬데믹의 충격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FAANG 기업의 실적에서도 온도차가 나타나기 시작한 탓이다.
이 같은 FAANG의 탈동조화는 지난달부터 이어진 작년 4분기 실적 발표를 계기로 정점을 찍었다. 애플과 구글, 아마존은 FAANG의 자존심을 지킨 반면, 페이스북과 넷플릭스는 주가가 20% 넘게 폭락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주식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FAANG 거래가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경쟁 심화에 고꾸라진 ‘F’와 ‘N’
최근 페이스북의 주가 폭락은 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페이스북은 4분기 실적 발표 다음 날인 지난 3일(현지 시각) 하루 만에 주가가 26% 떨어지면서 시가총액 2320억달러(약 278조원)가 증발했다. 2020년 9월 애플(1820억달러) 이후 미국 기업 역사상 하루 만에 가장 큰 시장가치 폭락이다. 코스피로 치면 LG에너지솔루션과 SK하이닉스, 삼성바이오로직스, 네이버, LG화학 등 삼성전자를 제외한 상위 5개 기업이 하루 만에 사라진 셈이다. 지난달에는 넷플릭스 역시 주가가 하루 만에 22% 폭락하며, 10년 만에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다.
두 회사가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은 건 크레이머가 FAANG의 요건으로 꼽았던 ‘시장 지배적 지위’를 잃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과 넷플릭스는 원래 소셜미디어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시장을 독점하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이번 실적 발표에선 경쟁 기업들의 도전에 따른 성장 둔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페이스북은 일일 활성 사용자수(DAU)가 지난 분기보다 100만명이나 줄었다. 페이스북 18년 역사상 첫 역성장이다. 페이스북은 실적 발표에서 중국 바이트댄스의 틱톡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최고경영자)는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많은 선택지가 있고, 틱톡과 같은 앱은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페이스북은 틱톡으로 이탈하는 Z세대를 잡기 위해 틱톡과 유사한 인스타그램 릴스를 출시했으나, 이는 오히려 페이스북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전통적인 페이스북의 뉴스피드 형식에 비해 릴스에선 광고를 노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역시 가입자 성장세가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다. 지난해 신규 가입자 수는 1820만명으로 2020년(3360만명)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다. 전망도 좋지 않다. 넷플릭스가 제시한 올해 1분기 신규 가입자 수는 250만명으로, 월가 예상치(693만명)보다 64% 낮다. 넷플릭스는 “지난 2년간 전 세계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개발하면서 경쟁이 심화됐다”고 했다. OTT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저스트와치에 따르면 2020년 미국 OTT 시장의 넷플릭스 점유율은 33%에 달했으나, 작년 3분기엔 27%로 떨어졌다. 대신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21%), 디즈니 플러스(14%), 훌루(13%), HBO 맥스(10%) 등이 두 자릿수 점유율을 기록하며 치고 올라왔다. 스트리밍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넷플릭스는 콘텐츠 제작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다. 콘텐츠 지출이 늘면서 작년 4분기 넷플릭스 영업이익률은 8.2%로 전년 동기(14.4%)보다 큰 폭으로 하락했다.
◇여전히 탄탄한 ‘트리플A’
반면 애플과 구글(알파벳), 아마존 등 ‘트리플A’는 견고한 시장 지배적 지위를 재확인하며 주가 방어에 성공했다. 애플은 공급망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 매출을 올렸다. 애플 4분기 매출은 1239억달러(약 148조2091억원)로 전년보다 11% 증가해 월가 예상치(1186억달러)를 큰 폭으로 상회했다. 아이폰 매출도 9% 늘었다. 애플은 지난 4분기 중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23%를 차지하면서 비보(19%), 오포(17%) 등 중국 브랜드를 제치고 6년 만에 중국 시장 1위를 탈환했다. 특히 앱스토어와 애플 뮤직, 애플TV플러스 등 구독 서비스를 합친 서비스 부문 매출이 전년보다 24%나 증가했다. 안젤로 지노 CFRA 리서치 분석가는 “애플은 하드웨어 성장 없이도 서비스 사업만으로 높은 성장을 할 수 있는 회사”라며 “어린 사용자들은 애플 플랫폼 안에서 성장하고 있고, 13~34세가 원하는 것은 애플 제품 뿐”이라고 했다.
구글 역시 온라인 광고 시장을 장악하며 블록버스터급 실적을 기록했다. 구글 매출은 753억3000만달러(약 90조1097억원)로 전년보다 32% 증가했다. 주력 사업인 온라인 광고 매출이 전년보다 33% 성장한 612억4000만달러(약 73조2553억원)를 기록했다. 컨설팅회사 에비쿼티에 따르면 구글의 온라인 광고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44.3%로 2020년(40.4%)보다 4%포인트가량 올랐다.
애플과 구글이 핵심 사업의 경쟁력을 유지한 덕분에 괴물 같은 실적을 냈다면, 아마존은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 덕분에 위기를 탈출한 케이스다. 공급망 혼란에 따른 비용 상승으로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마존은 클라우드 사업과 온라인 광고 수익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부진을 만회했다. 클라우드 사업인 아마존웹서비스(AWS) 매출은 177억8000만달러(약 21조2684억원)로 전년보다 40% 가까이 증가했다. AWS는 클라우드 시장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온라인 광고 매출 역시 전년보다 32% 증가한 97억1600만달러(약 11조6223억원)를 기록했다.
아마존 프라임 멤버십 가격 인상 역시 호재로 받아들여진다. 아마존은 연간 프라임 멤버십 가격을 이달부터 17% 올리기로 했다. 피터 코핸 미 뱁슨칼리지 교수는 포브스 기고문에서 “프라임 가격을 인상하면 아마존 매출이 40억달러 더 늘어날 수 있다”며 “이는 (공급망 혼란으로 인한) 인건비 및 운송비 상승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했다. 아마존은 실적 발표 다음날 주가가 14% 올라 하루 만에 시가총액이 1910억달러(약 228조원) 불어났다.
◇옥석 가리기 나선 투자자들
한 몸처럼 움직이던 FAANG의 실적 차별화에 투자자들도 옥석 가리기에 돌입했다. 특히 고강도 금리 인상이 임박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더 분주해졌다. 지난 2년간 팬데믹으로 인한 제로 금리 환경에서는 투자자들이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술주에 ‘묻지 마 베팅’이 가능했다. 그러나 금리 인상기에는 주식, 특히 성장주 투자의 기회 비용이 대폭 늘어난다. 시노버스 트러스트의 대니얼 모건 선임 매니저는 WSJ에 “‘빅테크’라는 이름만 보고 투자자들이 다트를 던지던 시절은 지났다”며 “투자자들은 ‘각 회사의 미래 성장 동력에 대한 투자가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씨름하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FAANG의 열등생으로 전락한 페이스북과 넷플릭스는 미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페이스북은 사명을 ‘메타(Meta)’로 변경하며 ‘메타버스(Metaverse·3차원 가상 세계)를 신사업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저커버그 CEO마저 메타버스 환경이 실현되기까지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당분간은 회사 성장에 크게 기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메타버스 사업을 추진하는 AR·VR기기 부서인 리얼리티 랩스의 지난해 순손실은 102억달러(약 12조2400억원)에 달한다.
데이터 분석회사 글로벌데이터의 레이첼 존스 애널리스트는 CNN에 “페이스북은 메타버스에 매료돼 핵심 비즈니스 모델을 희생시키고 있다”며 “메타버스 기술은 거대하고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성공하려면 적어도 1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최대 투자은행 JP모건은 사상 처음으로 페이스북 등급을 ‘매수’에서 ‘중립’으로 하향하면서 “광고 성장세가 크게 둔화하는 가운데, 비용이 많이 들고 불확실한 메타버스로 전환을 시작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넷플릭스는 성장 정체의 돌파구로 ‘게임’을 선택했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CEO는 실적 발표에서 “우리는 게임업계에서 차별화된 능력을 갖춰야 한다”며 “단지 업계 내에 있는 게 아니라 업계에서 최고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넷플릭스는 작년 11월부터 안드로이드와 iOS 환경에서 구동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을 잇따라 출시했다. 넷플릭스 구독 회원이라면 별도 요금 없이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굵직한 흥행작을 내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회사가 선보인 게임들도 대부분 카드, 슈팅 같은 단순한 장르로 게임 마니아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MANTA’로 움직이는 새 지형
FAANG의 시대가 저물면서 월가에선 기술주를 대표하는 새로운 조어가 등장하고 있다. CNN은 지난해 말 골드만삭스의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MANTA(마이크로소프트·애플·엔비디아·테슬라·알파벳)’라는 새로운 조어를 선보였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작년 4월부터 S&P500 지수 상승 폭의 51%를 이 5개 회사가 이끌었다. CNN은 “이제 FAANG은 은퇴하고, MANTA의 시대를 맞이할 때일지 모른다”고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늘 기술주 상위에 있었으나, PC 운영체제 ‘윈도’의 이미지가 워낙 강한 탓에 모바일 기반의 혁신 기업들로 꼽히는 FAANG에서 소외됐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클라우드 서비스 ‘애저(Azure)’ 매출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작년 4분기 애저를 포함한 MS의 전체 클라우드 매출은 전년보다 32% 증가한 221억달러(약 26조4537억원)를 기록했고, 애저 매출은 46% 성장했다.
MS가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꼽는 게임 사업 역시 순항 중이다. MS의 구독형 클라우드 게임 서비스 ‘엑스박스 게임패스’ 구독자는 2500만명으로 1년 전보다 39% 늘었다. 아직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플러스’ 구독자(4700만명)에는 한참 못 미친다. 다만 MS가 지난달 발표한 북미 최대 게임사 액티비전 블리자드 인수를 잘 마무리 짓는다면 판도가 뒤집힐 수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브래드 실스 분석가는 “MS는 애저와 클라우드 기반 오피스 365 제품군, 엑스박스 게임 패스 수익을 통해 향후 3~5년 동안 지속적으로 두 자릿수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고 했다.
테슬라와 엔비디아 역시 새로운 빅테크 지형을 주도할 기업으로 꼽힌다. 전기차 시장을 선도하는 테슬라의 작년 4분기 매출은 177억2000만달러(약 21조2108억원)로 전년보다 65% 증가했다. 순이익은 전년보다 760% 증가한 23억2000만달러(약 2조7770억원)에 달했다. 도이체방크의 에마뉘엘 로스너 분석가는 “테슬라의 배터리 기술과 제조 능력, 비용 절감에 대한 목표가 전기차 시대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테슬라의 전기차 시장 주도권을 확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최근 페이스북의 시가총액을 뛰어넘은 그래픽처리장치(GPU) 기업 엔비디아는 반도체 기업 최초로 시총 1조달러 클럽에 도전하고 있다. 펀드스트랫 자산운용은 보고서에서 “FAANG의 N을 엔비디아가 대체해야 한다”며 “엔비디아는 비디오게임과 가상화폐, 인공지능, 메타버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유망 산업에 진출해 있으며, 지속적으로 강력한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
Newsletter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7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