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강력한 경제·금융 제재 조치를 쏟아내던 서방 진영이 에너지 제재라는 ‘최후 카드’까지 꺼내 들면서 세계 경제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세계 3위 원유 생산국이자 2위 천연가스 생산국인 러시아의 에너지를 거부할 경우, 초인플레이션이 벌어짐과 동시에 글로벌 공급·생산 체계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對)러시아 에너지 제재는 적군뿐 아니라 아군에게도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양날의 검’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하며 자유주의 대 비자유주의 체제 간 대결 양상으로 치닫자 결국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 주도의 에너지 제재
일단 현재까지는 서방 진영에서 미국만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금수 조치를 발표한 상태다. 지난 8일(현지 시각) 이러한 내용을 발표한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산 원유는 물론 가스, 석탄까지 수입 금지 대상에 포함되며, 외국 기업이 러시아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미국인이 자금을 대는 것도 금지한다”고 밝혔다. 반면 유럽은 나라마다 태도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에너지 제재 동참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제 금융 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에서 러시아를 퇴출시키는 것을 비롯해 러시아 은행·공공기관 및 주요 인사들의 자산 동결, 러시아 국채 거래 전면 중단 등 대부분의 경제·금융 제재 조치를 발맞춰 시행해 온 그간 행보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미국만 할 수 있고, 유럽은 못 하는 이유는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 차이다. 미국이 수입하는 원유 중 러시아산 비율은 3%에 불과하고, 석유 제품까지 포함해도 7% 정도다. 반면 유럽은 원유 수입량 25%, 가스 수입량 40%가 러시아산이다. 미국은 러시아산 원유를 들여오지 않더라도 자국 내 셰일오일을 더 채굴하거나 남미 등 인근 유전에서 들여오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으나 유럽은 지정학적 여건상 러시아산을 대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난 7일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는 “몇 달간 러시아 에너지 대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하룻밤 사이에 이뤄질 수 없었다”고 했고, 바이든 대통령도 “많은 동맹이 (에너지 제재에) 동참하지 못하는 점을 이해한다”고 한 것을 보면 미국과 유럽의 상황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유럽 전체가 에너지 제재를 하기는 어렵고, 향후 영국과 프랑스 등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그나마 낮은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제재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낙인’찍힌 러시아産 원유...中이 돌파구
석유·가스 수출은 러시아 국가 예산의 36%를 차지할 만큼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하지만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은 전체 하루 수출량(작년 기준 720만~780만배럴)의 8%인 62만배럴 정도이기 때문에 미국이 에너지 금수 조치를 한다 해도 당장 크렘린궁의 숨통을 끊어놓을 만한 수준은 아니다. 다만 전문가들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이 러시아산 에너지에 ‘낙인’을 찍는 일 자체가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의 조치가 있기 전부터 시장에서는 향후 서방 진영의 제재 가능성에 대한 우려와 은행들의 신용장 발급 거부 등으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번 조치로 이러한 ‘셀프 제재(Self-sanction)’의 강도가 훨씬 세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셋증권 이진호 연구원은 “브렌트유 대비 배럴 당 2달러 정도 저렴했던 러시아 우랄산 원유가 최근 22.7달러나 낮은 가격에 풀렸으나 아무도 입찰하지 않았다”며 “미국의 조치까지 겹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러시아가 팔리지 않는 원유를 우방(友邦)인 중국에 대량으로 공급하며 위기를 헤쳐나갈 것으로 보고 있다. 코로나 제로 정책과 부동산 위기 등으로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있는 중국으로서도 값싼 원유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를 예견한 듯 지난달 열린 베이징올림픽 때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원유·가스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러시아 국영 가스 기업 가즈프롬과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가 연간 100억㎥의 천연가스를 거래하고, 러시아 국영 석유 회사 로스네프티는 CNPC에 10년간 1억톤(t)의 원유를 공급하기로 했다.
◇턱없이 부족한 원유...인플레이션 폭등 우려
미국이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보이콧함으로써 전 세계 원자재발(發) 인플레이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에너지 제재에 대한 우려로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이달 들어서만(9일 기준) 30% 넘게 올랐다. 같은 기간 유럽 천연가스 가격 지표인 네덜란드 TTF 선물은 130%가량 폭등했다. 미국과 유럽이 치솟는 물가에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 에너지 제재를 발표하며 “자유를 지키는 데는 비용이 든다”고 말한 이유다.
에너지 공급 부족 사태를 해결하려면 다른 산유국들의 적극 증산이 필수적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산유국 모임인 OPEC+(오펙플러스)는 이달 초 열린 정례 회의에서 작년부터 지속해온 ‘일간 40만배럴 증산(전월 대비)’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급등하는 유가를 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하지만 산유국들은 나이지리아·앙골라·리비아 같은 나라가 원유 생산량 목표치를 여전히 채우지 못하고 있는 데다 OPEC+ 내 입김이 강한 러시아 눈치를 봐야 하는 탓에 쉽사리 증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러시아산 원유를 대체하기 위해 생산을 늘릴 능력을 가진 나라는 현재 미국을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이란, 베네수엘라 정도인데 다 합쳐도 하루 480만배럴 증산에 그친다. 올해 세계 원유 수요량이 하루 1억70만배럴인 점을 감안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우크라이나 사태가 해결되고 제재가 풀리지 않는 한 유가 급등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글로벌 자산 운용사 슈로더는 최근 보고서에서 “에너지 제재가 시작되면 인플레이션 쇼크가 일어나고, 공급망 제약이 확대되며 글로벌 기업 실적에 막대한 손실을 입힐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