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패스트푸드 체인 맥도널드는 지난 8일(현지 시각) 성명을 내고 러시아에 있는 850개 매장을 잠정 폐쇄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소비에트 연방(소련) 시절인 1990년 러시아에 진출했던 맥도널드가 32년 만에 운영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자 이날 러시아 현지 맥도널드 매장 곳곳에선 ‘마지막 빅맥’을 먹기 위한 소비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한국 돈 만원도 넘지 않는 햄버거 세트를 4만~5만루블(약 35만~44만원)에 되파는 게시물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글로벌 기업들의 ‘러시아 보이콧(거부)’ 움직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지고 있다. 스타벅스, 코카콜라, 나이키 같은 소비재 기업뿐 아니라 에너지·IT·금융·물류·항공·자동차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보이콧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 당사국도 아닌 제3국 기업들이 큰 손실을 감수하며 특정 국가에 동시 다발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건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다. 세계화 이후 글로벌 기업들의 막강해진 영향력과 평판 관리의 중요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현상이다.
◇러시아 균열 일으키는 기업 보이콧
글로벌 기업들의 각종 서비스가 중단되면서 러시아의 일반 시민들은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예컨대 애플의 모바일 결제 서비스인 애플페이 사용이 제한되면서 모스크바 지하철 개찰구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글로벌 카드사인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지난 5일부터 러시아 은행에서 발행된 신용카드에 대한 서비스 제공을 중지하자 러시아 국민의 경제활동에 큰 지장이 빚어졌다. 태국관광청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이후 푸껫을 찾은 러시아 관광객 약 2200명이 해외 결제 마비와 러시아 국적기의 운항 불가로 귀국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기도 했다.
이런 압박은 러시아 내 반전(反戰) 여론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이달 초 러시아 성인 164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우크라이나 침공 지지가 59%, 반대가 23%로 나왔다. 미국 여론조사 전문가 게리 랭거는 “러시아 정부의 정보 통제 경향을 감안할 때 59%는 비교적 낮은 지지율”이라고 했다.
반전 시위 참가자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러시아 비정부기구 OVD-인포에 따르면, 지난 6일 하루 동안에만 모스크바 등 56개 도시에서 최소 4357명이 시위로 경찰에 체포됐다. 지금까지 파악된 시위 관련 구금자 수는 1만4900여 명에 달한다. 모스크바에 사는 대학생 아나스타샤 나우멘코는 AFP에 “넷플릭스 영화도 볼 수 없게 됐고 좋아하던 브랜드 상품도 살 수 없게 됐다”며 “모두 문을 닫은 탓”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美 정부와 여론이 무서운 기업들
글로벌 기업들의 러시아 지역 철수는 막대한 손실을 수반한다. 맥도널드에 러시아 시장은 유럽 전체 영업이익의 10%를 차지하는 주요 시장이고, BP만 해도 이번 철수 결정으로 250억달러(약 30조원)가량의 손실을 예상한다. 오스트리아 석유사 OMV는 15억~18억유로(2조300억~2조4400억원)의 손실을 감수하고 철수를 결정했다.
이윤을 최우선시하는 기업들이 이렇게 큰 손실에도 철수를 강행하는 배경에는 미국의 강경한 대(對)러시아 경제제재가 있다.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 말고도 미국이 내놓은 러시아 제재 수단은 다양하다. 해외직접제품규칙(FDRP)과 국제금융결제망(스위프트) 퇴출 조치가 대표적이다. FDRP는 미국 밖 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도 미국산 기술이나 소프트웨어가 활용됐다면 러시아 수출 전 미국 상무부의 허가를 받도록 한 조치다. 스위프트는 200여 국가의 1만1000개 은행을 연결한 국제금융거래망이다. 스위프트 퇴출로 러시아의 국제 결제가 불가능해지자 비자와 마스터카드도 서비스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제재의 직접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소비재 기업들까지 탈(脫)러시아 행렬에 동참한 이유는 주로 ‘평판’ 때문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기업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면서 기업들 역시 여론에 민감해진 것이다. 빅테크 중 제일 먼저 러시아 제재에 뛰어든 페이스북은 지난 2020년 5월 트럼프 전 대통령의 혐오 게시글을 방치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광고 보이콧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비교적 뒤늦게 러시아 보이콧에 동참한 맥도널드와 코카콜라 역시 최근까지 소셜미디어상에서 불매 운동 키워드가 빠르게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국내 기업들 딜레마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 LG전자 등 러시아에 진출한 국내 기업은 아직 공식적으로 러시아 보이콧을 선언한 곳이 없다. 러시아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워낙 크다 보니 쉽게 발을 빼기 어려운 처지다. 지난 2007년부터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작년에도 시장 점유율 30% 1위로 2위 애플(15%)을 크게 앞질렀다. 러시아 시장에 10년간 공들여온 현대차그룹 역시 지난해 현대차(10.3%·3위)와 기아차(12.3%·2위) 점유율을 합치면 러시아 현지 업체 아브토바즈(22.3%·1위)를 근소하게 앞선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이 섣불리 보이콧에 동참했다간 오랜 시간과 거액을 투자해 쌓은 공든탑을 무너뜨리고 중국 같은 친(親)러시아 기업에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 반면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한국 기업들이 받는 보이콧 참여 압력은 더 높아지고 더 큰 시장인 북미와 유럽에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셰헤레자드 레먼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CNBC에 “(러시아에서) 철수가 늦어질수록 (기업들의) 평판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며 “루블(러시아 통화)에 갇혀 있는 건 좋은 사업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경유 산업연구원 시스템산업실장은 “현대차 전체 매출에서 러시아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5% 안팎이지만, 러시아에 함께 진출한 국내 부품 업체에는 큰 타격”이라며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피해가 있는 심각한 딜레마 상황”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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