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5일 오후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야미리에 있는 한 공장에서 ‘탁탁탁’ 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렸다. 공장 한구석에 놓여 있는 기계에서 지름 1.1㎝, 길이 7.5㎝ 크기의 분필이 쉼 없이 찍혀 나왔다. 이 공장에서 하루 동안 생산된 분필은 8만여 개. 이들은 국내 문구점뿐 아니라 미국·중국·유럽·필리핀 등 8개 나라에 수출된다.

화이트보드와 전자칠판이 교실을 점령한 시대에도 초록색 칠판과 흰색 분필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학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런 수학자들에게 ‘분필계의 롤스로이스’로 불리는 제품이 이곳 포천 공장에서 생산되는 ‘하고로모’다. 50년 가까이 풀리지 않았던 난제 ‘리드 추측’ 등을 풀어 천재 수학자로 불리는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수학자는 분필과 칠판을 사랑하는 최후의 사람들”이라며 “하고로모 분필이 전 세계 수학자들의 심리적 안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했다.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하고로모(羽衣)는 본래 1932년 일본 나고야에서 설립된 회사다. 지금은 수학 강사 출신의 신형석(52) 대표가 운영하는 ‘세종몰’이 생산한다. 80년 역사의 일본 분필 회사가 어떻게 한국 회사로 재탄생했을까. WEEKLY BIZ가 경기도 포천 공장에서 신 대표를 만났다.

지난달 15일 경기도 포천시에 있는 하고로모 분필 공장에서 신형석 대표가 다양한 색깔의 분필을 소개하고 있다. /김세린 인턴기자
이 회사는 최근 펀슈머(재미를 주된 구매 요인으로 삼는 소비자)를 위해 분필 패키지를 닮은 핸드크림도 내놨다. /김세린 인턴기자

◇수학 강사 그만두고 뛰어든 분필 사업

-왜 분필이었나.

“2003년 학원에서 재수생들을 상대로 수학을 가르쳤다. 그때 일본 도쿄에 있는 ‘요요기 주꾸’라는 학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학원 칠판에 빼곡히 수학문제 풀이 방법이 적혀 있었는데, 형광빛이 나는 노란색·파란색·붉은색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오더라. 내가 쓰던 분필보다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거기에 있던 분필 몇 개를 갖고 한국으로 돌아와 수업 시간에 써 봤다. 그랬더니 뒷자리에 있는 아이들까지도 잘 보인다고 했다. 인터넷 강의에도 써 봤는데, 화면을 보면 색이 아주 밝고 또렷했다. 나는 그때 학생들 사이에서 ‘예쁜 색상 분필 잘 쓰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났다.”

-돈 잘 버는 강사를 그만두고 모험을 택했다.

“분필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2006년에는 분필 제작회사를 찾아갔다. 일본 나고야에 있는 하고로모라는 회사였다. 그때 사장인 와타나베씨를 알게 됐다. 그때부터 서로 연락하고 지냈는데, 10여 년이 흘러 그가 건강이 나빠져서 회사를 접는다며 나에게 일본에 한번 와 달라고 연락이 왔다. 가서 이런저런 사정을 듣다가 반 농담으로 ‘내가 당신 회사를 인수해, 한국에서 분필 공장을 세워 키워보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제조업이 힘들다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리더라. 나는 한국에 돌아와 지인들과 의견을 나눴고, 품질 좋은 분필이 이렇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결심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타나베 사장에게 진짜 한번 해보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동의했다. 그때가 2015년이다.”

-회사를 한국에 넘기는 데 대한 거부감은 없었나.

“일본 회사는 와타나베 사장의 할아버지가 세웠다. 일본은 대(代)를 이어 하는 사업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지만, 하고로모라는 이름 대신 자기 브랜드를 사용하려 해서 와타나베 사장이 망설였다. 외국 업체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도 와타나베 사장은 나를 오랫동안 알았고, 친자식처럼 생각했기에 나에게 회사를 넘겼다. 나는 회사를 인수하지만, ‘하고로모’라는 이름은 유지하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널리 알려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 사장은 정말 열심히 도와줬다. 1억원짜리 분필 제작 기계를 300만원에 넘겨주는 등 사실상 기계값만 받고, 모든 것을 넘겨줬다. 회사를 넘긴 후에도 포천까지 자주 찾아와 기계에 문제가 없는지 돌봐줬다. 202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우리 공장에 문제가 없는지 물었다.”

-회사 경영은 어땠나.

“물론 쉽지 않았다. 평생 아이들만 가르쳤으니까. 회사 인수 자금은 은행에서 대출받아 마련했다. 2015년 기계를 가득 실은 40피트짜리 컨테이너 16개를 일본 나고야에서 포천으로 옮기는 작업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했다. 매출이 계속 오르니 자신감이 생겼다. 2016년 3억원 매출로 시작해 지난해 20억원을 찍었다. ‘하고로모 분필’은 우리가 회사를 인수하기 전만 해도 미국의 몇몇 교수가 사가는 귀한 분필이었다. 우리가 인수한 이후 발품을 열심히 팔았고, 그 결과 지금은 미국 하버드대·스탠퍼드대·컬럼비아대, 중국 베이징대·칭화대 등 유명 대학 교수들이 사다가 쓸 정도가 됐다. 지금 생산해내는 분필 가운데 40% 이상은 외국에 판매한다.”

학원 강사 출신인 신 대표는 와타나베 사장이 회사를 문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2015년 '분필계의 명품'으로 불리는 일본 하고로모를 인수했다. 생전의 와타나베 사장과 신 대표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신형석 대표

◇일본에서 전수받은 황금 레시피

현재 미국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는 ‘세종몰’이 제작하는 하얀색 분필 72개 한 세트가 29달러(약 3만5400원)에, 형광색 분필은 49.9달러(약 6만9900원)에 팔린다. 다른 일반 분필보다 2~3배 비싸다.

-과거와 현재 분필에 차이가 있다면.

“1970년대에 선생님들이 썼던 분필은 석고로 만들어 냈다. 입자가 대단히 가벼워, 가루가 공중에 날릴 수밖에 없다. 2000년대 들어 만들어진 분필은 탄산칼슘이 주 원료다. 탄산칼슘을 압축해서 가래떡 만드는 것과 비슷한 기계에 집어넣어 뽑아낸다. 예전 석고 분필 1개는 무게가 6g 정도였는데, 탄산 분필은 12g으로 두 배다. 무겁다 보니, 가루가 공중에 날리지 않고 아래로 떨어진다. 특히 우리 분필은 고급 형광 재료와 탄산칼슘을 적절하게 섞어 최고 품질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황금 레시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다른 제품보다 훨씬 밝고 선명하게 보인다.”

-그래도 갈수록 학생이나 선생님들은 전자칠판에 익숙해져 가는데.

“2015년에 일본 회사가 문 닫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평생 쓸 분필을 한꺼번에 사갔던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하더라. 그분들 가운데는 몇 세기에 걸쳐 풀리지 않았던 문제를 풀어내 ‘필즈상(탁월한 업적을 남긴 40세 미만 수학자에게 수여되는 상)’을 탄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분필의 장점에 대해 강조하는 게 ‘안정감’이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는 전자칠판 등이 주는 화려함보다는 안정감이 더 중요하다. 전자 칠판만 사용하면 눈 건강에도 좋지 않다. 기존 칠판을 주로 쓰면서, 전자 칠판은 보조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흐름이 이어진다면 분필은 계속 필요할 거라고 본다.”

-분필 하나로 끝까지 밀고 갈 건가.

“분필 사업을 하다 보니 다른 문구류에도 관심이 생긴다. 젤 펜이나 샤프, 형광펜 등 일반 문구류 제작에 나서려고 한다. 외국에 분필을 팔다 보니 우리나라 문구류에 대한 관심이 많더라. 즐거움을 만들 수 있는 분필·문구류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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