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석

지난해 한 중견기업에 취업한 김은영(32)씨는 입사 초기 회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업무 실수가 잦아 상사에게 계속 지적을 받는 데다, 나이 어린 동기들이 금방 업무에 적응하는 것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매일 밤 퇴사 고민에 잠 못 이루던 김씨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회사가 제공한 복지 덕분이었다. 회사가 끊어준 멘털 케어(정신 건강 관리) 앱 이용권으로 전문 상담사와 지속적으로 텍스트 상담을 하면서 안정을 찾게 된 것이다. 김씨는 “만약 회사가 제공한 복지가 대면 상담이었다면 부담스러워서 이용조차 안 했을 것 같다”며 “익명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편안하게 상담을 할 수 있어 쉽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이후 업무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번아웃 증후군’을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이로 인해 생산성이 저하되고, 직원들의 퇴사나 이직이 늘자 국내외 기업들은 직원들의 정신 건강을 개인의 영역이 아닌 조직 차원의 과제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수요가 늘면서 팬데믹 기간 디지털 멘털 케어 시장 규모가 급성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전 세계 디지털 멘털 케어 스타트업들은 지난해 55억달러(약 6조7419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전년(23억달러) 대비 139% 증가한 액수다. 팬데믹 이전 단 한 개에 불과했던 멘털 케어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기업)은 팬데믹을 거치며 10개로 늘었다. 미 경제매체 블룸버그는 “팬데믹으로 직원들의 정신적 고통이 증가하고, 가상 의료 서비스로 신속한 전환이 일어나면서 직원 멘털 케어 분야에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직원 정신 건강 챙기는 기업들

직원들의 멘털 케어는 기업들이 인재를 유치하고, 유지하는 주요 전략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컨설팅 기업 머서가 지난해 전 세계 1만4000명의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멘털 케어를 받는 직원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현재 조직에 머무를 가능성이 42%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직원 두 명 중 한 명은 회사의 멘털 케어에 대한 투자가 ‘극도로’ 또는 ‘매우’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 같은 경향은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에서 두드러진다. 비영리기구 마인드셰어파트너스의 조사에 따르면, 퇴사 이유에 정신 건강 문제가 일부라도 포함돼 있었다고 답한 근로자 비율이 밀레니얼세대 68%, Z세대 81%로 전체 근로자 평균(50%)에 비해 훨씬 높았다.

팬데믹 이전에도 기업 내 임직원의 정신 건강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EAP(근로자 지원 프로그램·Employee Assistant Program)’를 운영하는 기업은 있었다. 그러나 기존 EAP는 절차가 복잡하고 익명성이 떨어져 대다수 기업에서 사용률이 5%를 밑돌았다. 대면 수단에 치우쳐 있어 팬데믹 시기에 활용하기도 적절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 기업들은 멘털 케어 스타트업에 EAP를 맡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카이저가족재단 설문조사 결과 직원 50인 이상 기업의 39%가 팬데믹 이후 직원들의 멘털 케어 혜택을 확대하기 위해 디지털 수단을 추가했다.

하겐다즈로 유명한 미국 식품 대기업 제너럴 밀스는 지난해 기존 EAP를 폐기하고, 멘털 케어 유니콘 기업인 스프링헬스 서비스를 채택했다. 스프링헬스는 온라인 설문과 상담을 통해 이용자의 증상, 병력, 가족력, 사회적 관계 등을 조사한다. 이를 통해 확보한 사용자의 정신 건강 상태를 AI(인공지능)로 분석해 명상과 온라인 인지행동 치료, 상담과 코칭, 운동 요법 같은 치료법을 단계별로 제공한다. 150여 개 글로벌 기업 직원 200만명이 스프링헬스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스프링헬스 서비스를 도입한 뒤 제너럴 밀스 직원들의 상담 예약 대기 시간은 평균 25일에서 1.4일로 단축됐다.

글로벌 회계법인 언스트앤드영(EY)은 지난해부터 라이라헬스를 통해 매년 직원과 직원 가족에게 연간 25건의 무료 상담을 제공 중이다. 기업가치가 58억달러(약 7조1253억원)에 달하는 라이라헬스는 AI를 활용해 이용자에게 알맞은 심리 치료사나 정신과 의사, 멘털 코치 등 전문가를 매칭시킨다. 글로벌 전자상거래 업체 이베이는 EAP를 라이라헬스에 맡긴 뒤 직원들의 EAP 참여율이 7배 증가했다. 제임스 서모틴 이베이 직원 복지 매니저는 “예전 EAP의 경우 직원들이 필요할 때 적시에 도움을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고, 이로 인해 참여율이 3%에 불과했다”며 “라이라를 도입한 뒤 직원들은 클릭 또는 터치 몇 번만으로 개인에게 최적화된 상담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외 멘털 케어 스타트업 급성장

국내에서도 직원들의 심리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는 기업이 늘면서 관련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달 멘털 케어 앱 ‘트로스트’를 운영하는 휴마트컴퍼니와 협약을 맺었다. 포스코는 기존에도 사내 심리상담시설을 운영해 왔으나, 코로나로 대면 상담이 힘든 상황에서 직원들이 편리하게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트로스트를 통해 연 4회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했다. 24시간 전문 상담사들과 전화 또는 채팅 상담을 할 수 있고, 머신러닝 기술로 감정 데이터를 분석하는 감정일기, 명상, ASMR 등의 콘텐츠도 이용할 수 있다. 현재 국내 80여 개 기업에서 20만명의 근로자들이 이 앱을 이용하고 있다. 휴마트컴퍼니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5배 늘었다.

삼성전자와 네이버, NHN 등 130여 개 기업이 이용하고 있는 멘털 케어 앱 ‘마인드카페’ 운영사 아토머스는 지난 2월 200억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했다. 국내 멘털 케어 스타트업 가운데 최대 규모다. 마인드카페는 앱을 통한 비대면 심리상담과 코칭을 비롯해 그림 치료, 가족과 함께 참여하는 집단 상담 등도 제공하고 있다. 빅데이터 기술로 시각화·통계화된 조직 진단 보고서도 제공한다. 아토머스 관계자는 “마인드카페를 이용한 기업 근로자의 업무 생산성은 36% 증가했고, 불안 증세와 업무 시간 손실은 5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기업들이 임직원 멘털 케어의 중요성을 체감하면서 현재 20여 개 기업과 계약을 논의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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