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경제·금융 허브 역할을 해온 상하이와 홍콩이 중국 당국의 권위주의적 통제와 미·중 대립으로 ‘국제 도시’로서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 두 도시는 물류·교통 및 금융 인프라, 높은 국제화 수준, 풍부한 노동력과 저렴한 인건비 등을 앞세워 그간 글로벌 자금의 주요 경유지 혹은 종착지로 기능했다. 하지만 2017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중 갈등이 커지면서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무역 및 금융 분야에서 양국 간 제재가 장군멍군 식으로 이어지면서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들이 중국에서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없게 된 것이다.
2020년 팬데믹에 따른 중국의 고강도 방역, 홍콩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시행은 이러한 글로벌 기업들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촉매가 됐다. 올해 들어서는 중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우방이라는 점이 부각되고,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경제 수도인 상하이까지 봉쇄되자 두 도시에서는 외국 기업 및 자금의 엑소더스(exodus·대탈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2035년까지 상하이를 세계적 금융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중국의 야망이 위협에 직면한 것이다.
◇中 대도시 전면 봉쇄... 글로벌 자금 이탈 중
미·중 패권 경쟁으로 움츠러들었던 상하이·홍콩의 경제 활동 여건이 최악으로 치닫게 된 것은 코로나 탓이 컸다. 중국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팬데믹 초기부터 강력한 ‘제로 코로나(칭링·淸零)’ 방역을 시행했고, 경제 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상하이 근처에 생산 기지를 두고 상하이항을 통해 수출하던 글로벌 기업들은 확진자가 1명이라도 나오면 해당 건물을 통째로 봉쇄해버리는 중국식 ‘질식형 방역’에 지쳐갔다. 홍콩도 2020년 3월부터 거주 비자가 없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는 등 칭링 정책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팬데믹 이전 홍콩 공항에는 전 세계 200개 도시에서 매일 1100여 편의 여객·화물기가 들어왔지만 지난달 19일 기준 아시아·태평양 이외 지역에서 출발해 홍콩에 도착한 항공기는 단 1대에 불과했다.
올 초 오미크론 확산세가 가팔라지자 중국 당국은 지린성·광둥성 등의 대도시를 전면 봉쇄했고, 지난 3월에는 경제 수도인 상하이마저 문을 걸어 잠갔다. 상하이 봉쇄는 시장이 쉽게 예상하지 못한 카드였다.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을 앞두고 경기 하강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경제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칭링’의 기치 아래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 중국이 러시아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상하이·홍콩으로 향했던 글로벌 자금은 ‘손절(손실을 보고 매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해외 투자자들은 지난 3월에만 중국 본토 주식 70억달러(약 8조8000억원) 이상을 처분했고, 3~4월 중국 국채 140억달러(약 17조7000억원)어치를 팔아 치웠다.
◇중국 거주 유럽인 절반 떠나
상하이·홍콩을 글로벌 사업의 거점으로 삼았던 주요 기업들도 하나 둘 짐을 싸는 모습이다. 최근 애플을 비롯해 온세미컨덕터, 코카콜라, GE 등이 상하이 봉쇄로 제품 생산 및 물류에 차질이 빚어지자 중국 사업을 축소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유럽의 명품 기업 LVMH와 프랑스 로레알 등은 이미 지난해 홍콩 사업 본부를 대폭 축소하거나 폐쇄했다. 골드만삭스, JP모건 등 150여 사를 회원으로 둔 아시아증권산업금융시장협회(ASIFMA)가 작년 말 회원사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절반 정도(48%)는 “홍콩에서 직원을 철수시키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답했다.
특히 시장에서는 중국 의존도가 높은 애플의 탈(脫)중국화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애플은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으로 애플 노트북(맥북)을 전량 생산하는 대만 광다컴퓨터 상하이 공장이 3~4월 조업이 중단되고, 상하이와 장쑤성·저장성 등을 연결하는 광역 경제권인 ‘창장삼각주’가 봉쇄되며 반도체 조달에 애를 먹자 생산 기지를 인도, 베트남 등 주변국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가속화하고 있다.
국내 기업 중에서도 삼성전자가 중국의 휴대전화 생산 라인을 동남아 등지로 옮겼고, 현대차그룹은 2019년 4월 이후 가동을 중단한 중국 베이징1공장 부지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들의 엑소더스 조짐이 일어나면서 상하이·홍콩은 국제 도시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최근 심각한 외국인 유출이 빚어지고 있다. 홍콩 이민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3월 18만명 넘는 사람이 홍콩을 떠났지만 유입 인구는 3만9000명에 그쳤다. 14만명 넘는 인원이 순유출된 것이다. 조르그 우트케 주중 유럽연합상공회의소 회장은 “중국에 살던 유럽인의 절반이 팬데믹 후 중국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싱가포르·인도·대만 반사이익…한국은?
전문가들은 외국 기업 및 자금이 상하이·홍콩을 등지는 상황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제로 코로나 기조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올 2분기 경제정책 기조를 결정하는 지난달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회의에서도 칭링 정책은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370억달러(약 47조원)의 자금을 굴리는 영국 아르테미스 자산운용의 사이먼 에델스텐 매니저는 “러시아 제재의 불똥이 중국으로 튈 수 있다는 우려, 상하이 봉쇄 장기화 등으로 상하이·홍콩 엑소더스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하이·홍콩이 외면받으면서 반사이익을 보는 대표적인 지역은 상하이·홍콩과 함께 아시아 3대 금융 허브로 꼽히는 싱가포르다. 싱가포르관광청에 따르면 지난 3월 홍콩에서 싱가포르로 건너간 사람 수는 12만1190명으로 작년 3월(2만7200명) 대비 4.46배나 급증했다. 중국 내 공장들은 주로 인도, 베트남 등으로 떠나고 있다.
인도와 베트남은 노동력이 풍부하고 인건비가 저렴하다는 점에서는 중국과 비슷하지만 교통·물류 인프라가 약하고 중국만큼 소비력을 갖춘 거대 시장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간 후순위로 밀린 곳이다. 하지만 중국 내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항구가 폐쇄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인도와 베트남에서의 생산을 대폭 늘리기 위한 작업에 돌입한 상태다. 애플의 핵심 OEM 업체인 폭스콘의 경우, 지난 1분기 인도 공장의 아이폰 생산량을 작년 대비 50%나 늘렸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인도의 FDI(외국인직접투자) 증가율은 지난 2019년 -1%를 기록한 이후 2020년과 2021년에는 각각 13%, 19%나 증가했다. 대만 역시 중국에 진출했던 기업들의 리쇼어링(생산 기지 본국 회귀)으로 덕을 보고 있다.
한국은 상하이·홍콩 봉쇄에 따른 경제적 실익이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메리츠증권 최설화 연구원은 “금융 회사들이 상하이·홍콩을 떠나 서울로 오는 것도 아니고, 한국 제조업체들은 탈중국의 행선지를 동남아 쪽으로 잡고 있다”며 “생산 기지를 옮기고, 물류 체계를 조정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하기에 부담만 커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WEEKLY BIZ Newsletter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6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