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류 벤더업체에 다니는 박모(37) 과장은 지난달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이후 처음으로 베트남 하노이 출장을 다녀왔다. 3박 4일 일정으로 현지 외주 공장을 방문해 담당 브랜드의 생산 라인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박 과장은 “3년 만의 베트남 출장이었는데 그동안 전화나 화상회의, 이메일로만 소통하다 보니 답답할 때가 많았다”며 “현장에서 현지 직원들과 미팅을 하고 직접 공장을 돌아보니 놓치고 있던 문제점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팬데믹으로 2년 넘게 멈춰 섰던 기업 해외 출장이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 S&P500 기업 중 150곳 넘는 기업에 출장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행사 CWT는 기업 여행 예약률이 팬데믹 이전 수준의 50% 이상으로 회복됐다고 밝혔다. 오미크론 변이 확산이 정점에 이르렀던 올해 초만 하더라도 이 비율은 20%에 그쳤다. CWT는 “주로 기술, 소매, 정부 및 방위 산업 부문이 회복을 주도하고 있으며, 은행도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다”고 했다.
업계 1위 기업 출장 전문 여행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글로벌 비즈니스 트래블(아멕스GBT)의 기업 출장 예약도 2019년 수준의 61%까지 회복됐다. 전 세계 100여 국가에서 기업 출장 서비스를 하는 FCM 트래블은 2019년 대비 기업 출장 예약이 80% 수준으로 살아났고, 일부 지역은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FCM트래블의 버트런드 사일렛 이사는 블룸버그에 “그 누구의 예상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출장 여행이 회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비대면 한계에 출장 수요 폭발… 팬데믹이 알려준 출장의 가치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행업계에선 기업 출장이 회복되지 못하리라는 비관론이 우세했다. 글로벌출장여행협회(GBTA)에 따르면 2019년 1조4300억달러(약 1825조원)에 달했던 전 세계 기업 출장 비용 지출은 2020년 6610억달러(약 843조원)로 53.8% 급감했다. 지난해엔 7540억달러(약 961조원)로 전년보다는 반등했으나, 여전히 팬데믹 이전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지난해 블룸버그가 미국·유럽·아시아의 45개 대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기업의 84%가 코로나 종식 이후에도 출장 예산을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코로나 시대가 끝나도 기업 출장이 지금보다 50% 줄어들 것”이라며 “굳이 출장을 가지 않고도 집에서 일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올 들어 코로나 신규 확진자 수가 감소하면서 세계 각국이 해외 입국자에 대한 조치를 완화하자 기업 출장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비대면 수단에 의존한 사업 운영이 한계에 봉착한 탓이다. 철강 부품회사 엘링클링거의 마크 시엔코 수석제품관리자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최근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 출장을 다녀왔는데 효율이 높았다”며 “비대면으로는 고객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했다. 미국호텔숙박협회(AHLA)의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직장인의 85%가 ‘고객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하기 위해 직접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또 올해 출장을 다녀왔거나, 출장을 계획 중인 사람의 76%가 ‘직접 대면과 출장이 가상 상호작용에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생산성을 촉진시킨다’고 답했다. 칩 로저스 AHLA 회장은 “지난 2년간 기업과 직원들은 비대면 방식의 업무를 경험하면서 출장과 대면 회의의 가치를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인식하게 됐다”고 했다. GBTA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해외여행을 허용하고 있다고 응답한 기업 비율은 74%로, 두 달 전보다 26%포인트 상승했다.
국내에서도 지난달부터 해외 입국자 자가 격리 의무가 없어지면서 해외 출장을 허용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사업부장급 임원 결재를 받아야 해외 출장을 갈 수 있었지만, 지난달부터 해당 부서의 실장급 전결로 해외 출장을 갈 수 있게 했다. 삼성전자도 지난달 국내외 출장에 대한 지침을 ‘자제’에서 ‘허용’으로 변경했다. LG는 외교부 지정 코로나 위험 국가 외 해외 출장을 허용했고, SK하이닉스 역시 경영상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내부 검토 후 해외 출장이 가능하도록 지침을 변경했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 출장이 가속화하자 한국무역협회는 이달부터 회원사에게 출국용 코로나 검사비 할인을 제공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총수 및 사장단 위주로 해외 출장을 다녀오고 있으나, 실무진의 해외 출장도 늘고 있는 추세”라며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어 불안 요인 점검을 위한 해외 출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기지개 켜는 항공업계
해외 출장 수요가 크게 늘면서 항공업계에도 활기가 돌고 있다. 글로벌 회계법인 PwC에 따르면 전체 승객의 12%에 불과한 기업 출장 여행객은 팬데믹 이전 항공사 수익의 75%를 차지했다. 주요 수익원이었던 해외 출장 여행이 살아나자 항공사들은 잇따라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델타항공은 지난달 실적 발표에서 미국 내 기업 출장 예약이 2019년의 70% 수준에 도달했고, 2분기에는 더욱 증가할 것이라 전망했다. 유나이티드항공의 경우 대서양을 횡단하는 출장 여행 예약이 이미 2019년 수준을 넘어서자 올 여름에는 대서양 횡단 노선을 2019년 대비 25% 확대할 계획이다. 스콧 커비 유나이티드항공 CEO(최고경영자)는 “2분기에는 출장 회복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출장 여행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 향후 실적에 대해 자신이 있다”고 했다.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는 이달 초 출장 여행업체 트립액션과 함께 중소기업을 위한 출장 예약 및 관리 플랫폼 ‘비즈니스투고’를 출시했다.
다만 중국의 코로나 봉쇄가 길어지고 있어 완전한 회복까지는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아멕스GBT에 따르면 지난 3월 미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출장 예약은 2019년 수준의 59%까지 올라온 반면, 미국에서 중국·홍콩으로 가는 출장 예약은 2019년 대비 2%에 그쳤다. 전 세계 기업들이 투자자와 규제 당국으로부터 탄소 배출량을 줄이라는 압박을 받고 있는 것도 장기적으로 기업 출장을 저해하는 요소다. 유럽환경운송연합 앤드루 머피 이사는 “기업들은 항공 출장을 줄이는 것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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