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에 대한 신규 투자 규모를 작년 대비 절반 또는 4분의 1(25%)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
세계적인 투자사 소프트뱅크를 이끄는 손정의 회장은 지난 12일 연간 실적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프트뱅크가 운용하는 세계 최대 벤처 투자 펀드인 비전펀드가 지난 회계연도(2021년 4월~2022년 3월)에 274억달러(약 34조6100억원) 손실을 기록하자 스타트업 투자를 대폭 축소하기로 한 것이다. 비전펀드 설립 이후 최대 손실로, 이전 회계연도(2020년 4월~2021년 3월)에 7조5290억엔(약 74조7400억원) 수익을 거둔 것과 대조적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세계적으로 성장주가 하락하는 추세 속에서 인공지능(AI) 관련 스타트업 등에 투자한 비전펀드의 운용 실적이 악화됐다”며 “성장주 하락은 4월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어 향후 실적의 불확실성도 높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초저금리 기조와 디지털 전환에 힘입어 지난해 말까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던 글로벌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다. 기술주 약세, 금리 인상, 중국 당국의 테크 기업 탄압과 코로나 봉쇄, 우크라이나 전쟁 등 악재가 겹치면서 스타트업 시장의 자금줄이 막힌 것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피치북에 따르면, 올 1분기 미국 내 스타트업 투자 규모는 약 707억달러(약 89조2900억원)로 전 분기(954억달러) 대비 25.9% 줄었다.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사인 인덱스벤처스의 마이크 볼피 벤처투자가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번 사태는 분명 과속방지턱 같은 일시적인 사태가 아니다. 호황 사이클 끝에 오는 조정일 것”이라고 했다.
◇자금 압박에 정리 해고 나선 스타트업
스타트업 시장의 돈줄이 마른 배경에는 기술주 하락이 있다. FAANG(메타·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으로 대표되는 거대 기술 기업(빅테크)들은 지난 몇 년간 세계 주식시장을 주도해왔지만, 올해 들어서는 큰 폭의 하락을 겪고 있다. 심지어 역대 최고 1분기 실적을 기록한 애플도 주가가 20% 빠졌다. 실적이 뒷받침되는 빅테크마저 속절없이 하락하다 보니 비상장 기술 기업(스타트업)이 고평가된 것 아니냐는 회의론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비상장 주식 거래 플랫폼인 포지 글로벌에서 지난 2~3월 평균 거래 가격은 작년 4분기 대비 19.9% 하락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기술주 매도세가 스타트업으로 확산했다”고 평가했다.
주식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스타트업의 대표적인 투자금 회수 수단인 기업 상장(IPO)도 위축됐다. 시장조사 기관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올 1분기 전 세계 IPO는 143건으로 2016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전 분기(260건)와 비교하면 45% 급감한 수치다.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은 “시장이 급변해 기업과 투자자가 상장 시기를 조율하는 것으로 분석된다”고 설명했다.
자금 수혈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에게 실적 압박까지 받기 시작한 스타트업들은 생존을 위해 구조 조정에 나섰다. 지난해 10억달러를 조달하며 100억달러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은 미국 전자상거래 스타트업 스라시오(Thrasio)는 프리 IPO(상장 전 투자 유치)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직원 20%를 감축하고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줄줄이 축소했다. 미국 온라인 주식 거래 플랫폼 로빈후드도 지난달 정규직의 9%인 약 300명을 해고했다. 호핀(Hopin), 리프(Reef) 테크놀로지, 고퍼프(GoPuff), 카메오(Cameo), 워크라이즈(Workrise) 등 다양한 업종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전 세계 스타트업들의 정리 해고를 추적하는 사이트 ‘정리 해고 추적기(layoffs.fyi)’에 따르면, 올 1분기 스타트업에서 정리 해고된 인원은 9700명으로 전 분기(3292명) 대비 3배 가까이로 늘었다. 2분기 들어 이달 25일까지 해고된 인원은 1만3373명으로 1분기보다 많다. WSJ는 “기술 스타트업의 파티는 끝났다”며 “이제 스타트업은 직원을 해고하고 마케팅 비용을 줄이고, 프로젝트를 취소하는 등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해야 하는 처지”라고 전했다.
◇국내 유망 비상장 기업도 몸값 반 토막
국내 프리 IPO 시장에도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벤처 투자 정보업체 더브이씨 분석에 따르면, 올해 들어 이달 8일까지 프리 IPO 투자 규모는 2972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투자 규모(5450억원) 대비 45% 감소했다. 유니콘 기업의 가치도 폭락세다. 비상장 주식 거래 플랫폼 증권플러스 비상장에서 핀테크 기업 비바리퍼블리카(토스 운영사)의 추정 시가총액은 현재 12조원대로 지난 1월 추정 시가총액(21조원)의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추정 몸값이 한때 30조원에 달했던 두나무(업비트 운영사)도 이달 들어 몸값이 11조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야놀자와 컬리(마켓컬리 운영사), 쏘카 등 유망 비상장주도 상황이 비슷하다.
이보다 초기 단계인 국내 스타트업 시장도 최근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스타트업 지원 기관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지난달까지만 해도 국내 스타트업 투자는 호황을 이뤄 4월 투자 건수는 153건, 투자금은 약 1조2489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53%, 63.9% 증가한 것이다. 하지만 이달 들어선 지난 25일까지 신규 투자가 6122억5000만원으로 급감했다.
기술주 약세와 미국 스타트업 시장 위축이 한국 스타트업 업계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시완 디캠프 투자실장은 “스타트업을 향한 국내 투자자들의 관점도 점차 보수적으로 변하고 있다”며 “증시가 회복되기 전까지 스타트업 투자 시장의 반등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 터진 루나·테라 코인 사태도 대형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박성호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부대표는 “루나와 테라를 만든 테라폼랩스 역시 국내 핀테크 스타트업인 만큼 테라 사태가 스타트업 투자 심리를 크게 위축시키는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WEEKLY BIZ Newsletter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6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