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4일, 길이 6m짜리 컨테이너 200여 개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컨테이너선이 일본 후쿠이현 쓰루가항을 출항했다. 목적지는 돗토리현 사카이항. 약 300km를 항해하는 데 선원의 개입이 거의 필요 없었다. 출항부터 운항, 목적지 도착 후 정박까지 컴퓨터가 알아서 진행했다. 약 하루 동안 항해한 끝에 배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로 위에서 자율 주행 자동차 개발이 한창이듯 바다에서도 ‘자율운항선박’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 자율운항선박은 자율주행차처럼 인간 도움 없이 스스로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오가는 선박을 말한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리서치앤마켓에 따르면, 전 세계 자율운항선박 시장 규모는 지난해 896억달러(약 113조원)에서 2027년 1329억달러(약 168조원)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언뜻 생각하면 자율운항선박은 자율주행차보다 개발이 쉬워 보인다. 바다에는 길 위의 자동차만큼 많은 배가 떠다니지 않는다. 태평양·대서양 등 망망대해로 나가면 장애물도 거의 없다. 하지만 선박은 자동차보다 날씨나 파도에 민감하고, 자그마한 사고도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율주행차보다 자율주행선박 개발이 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이 경쟁에 영국, 노르웨이, 핀란드 등이 앞서가고, 한국, 일본, 중국 등이 뒤따라가는 형국이다.
◇AI 선장, 파도 높이·날씨도 읽어야
국제해사기구(IMO)는 자율운항선박 등급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배를 운항하는 선원의 의사 결정을 돕는 수준이고, 2단계는 외부에서 원격으로 선박을 제어할 수 있지만, 반드시 선원이 탑승해 각종 돌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수준이다. 3단계는 선원이 탑승하지 않고도 원격으로 돌발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수준, 마지막 4단계는 사람의 원격 제어 필요 없이 배 스스로 운항할 수 있는 단계다. 영국·노르웨이 등은 현재 2~3단계 수준의 기술을 보유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이 국가들과 비슷하거나 약간 뒤처진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배가 자율 운항하려면 스스로 날씨와 주변 선박 등을 ‘인지’하고, 적합한 대응을 ‘판단’한 뒤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인지를 위해 레이더와 라이다(LiDAR), 카메라가 쓰인다. 레이더는 전파가 물체와 부딪친 뒤 되돌아오는 속도로 거리를 파악해 주변 다른 선박, 각종 장애물 등을 파악하는 데 이용된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파도가 높아 장애물이나 주변 선박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라이다로 대처한다. 라이다에서 쏘는 빛의 파장은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단위로 짧아 비교적 가까운 거리(약 100~200m)에 있는 물체를 인식하는 데 강점이 있다. 주변 상황 파악을 위해 카메라도 사용되는데, 보통 소형선에는 측면과 후면에 4대, 대형선에는 8대 이상 설치된다.
이렇게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배는 선장이나 항해사가 하듯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AI) 기술에 기반한 자율 운항 시스템이 이 단계를 담당한다. 여동진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자율운송연구본부장은 “자율주행차는 방대한 데이터를 모을 수 있지만 바다를 떠다니는 선박은 운항 횟수가 적어 데이터 수집에 한계가 있다”며 “시뮬레이션이나 가상 상황을 만들어 시스템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군이 최초 개발, 영국·노르웨이 앞서
자율운항선박 개발에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군(軍)이다. 미국 등은 1990년대부터 적군 정찰이나 전파 교란, 나아가 군용선에 폭탄을 넣어 침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미 해군은 2012년 자살 폭탄 공격을 벌이는 테러리스트 선박에 대응하는 무인 고속정을 공개했다. 중국 해군도 스텔스 무인선을 2016년 개발했다고 밝혔다.
민간 영역에서는 2000년대 들어 개발이 본격화됐다. 2018년 영국 롤스로이스사는 핀란드 국영 해운사와 함께 길이 53.8m짜리 자율 운항 여객선에 승객 80여 명을 태우고 핀란드 남부 발트해 연안에서 50km를 왕복하는 시험 운항에 성공했다. 장애물이나 날씨 등 모든 상황은 배에서 50km 떨어진 곳에서 원격으로 모니터링하고 조종했다. 노르웨이는 무인 자율 운항 화물선 ‘야라 버클랜드호’를 올해 건조해 내년에 정식 운항에 들어갈 예정이다. 약 1년간 선원들이 탑승해 시험 운항한 뒤 내년에 자율 운항 3단계에 도전한다는 계획이다.
동아시아 국가들도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은 2019년 12월 홍콩-마카오 구간에 자율 주행 2~3단계에 해당하는 ‘근두운 0’호를 시범 운항했고, 올해 들어서는 공해상에서 원격 조종과 자율 항해가 가능한 과학연구선박을 건조했다. 일본은 지난 2월 최대 해운사 미쓰이OSK라인이 3단계에 준하는 자율 운항에 성공했다. 한국은 2020년 5월 자율운항선박기술개발통합사업단을 꾸렸고, 2024년 하반기쯤 자율 운항 3단계 선박을 띄운다는 계획이다.
◇선원 고령화 해결책... 완전 자율은 ‘글쎄’
각국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완전한 자율운항선박 탄생은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론도 있다. 무엇보다 자율운항선박은 자율주행차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바다에는 도로 위 차선처럼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고, 비, 바람, 안개 같은 기상의 영향도 육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자동차처럼 급하게 제동할 수 없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배는 정상 속도에서 멈추는 데 빨라도 5분 이상 걸린다.
인명 구조 등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인공지능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국제해사기구 협약은 바다에 사람이 빠지거나 주변에 조난 사고가 발생하면 반드시 구조에 나서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그러려면 유연한 대응이 필수적이다. 해상 사고가 발생하면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자율운항선박기술개발통합사업단 김진 단장은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건 등으로 인해 선박 사고에 특히 민감하기 때문에 안전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여러 난관에도 자율운항선박 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력난과 선원 고령화 때문이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지난 2020년 말 기준 우리나라 내항선(국내 항로로 오가는 배) 선원(외국인 포함)은 모두 8852명인데, 이 중 60대 이상이 57%다. 20·30대 젊은 선원은 17%에 불과하다. 오운열 해양수산과학기술진흥원장은 “젊은 사람들 사이에 바다 일은 힘들고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기 때문에 이대로 가면 배가 있어도 띄울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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