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의균

요즘 얼어붙은 세계 증시에서 오히려 순풍을 탄듯 독주하는 업종이 있다. 석유·가스 기업 중심으로 구성된 에너지 부문이다. 금융 정보 업체 팩트세트에 따르면, 대형주 중심인 S&P500에서 에너지 업종의 주당 순이익(EPS)은 올 1분기 245% 급증해 전체 11개 업종 중 독보적인 1위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S&P500 전체 평균 EPS 증가율이 4.6%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상승세다. 빅테크(거대 기술기업)가 몰린 정보기술(IT) 업종도 8.3% 증가에 그쳤다. 작년 1월만 해도 배럴당 50달러 안팎이던 국제 유가가 100달러 위로 치솟으며 고스란히 빅오일(거대 석유기업)의 수익으로 연결된 것이다.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는 지난 11일 애플을 제치고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상장사로 등극했다. 엑손 모빌·셰브론·BP(브리티시페트롤리엄)·토탈에너지·셸 등 빅오일로 지칭되는 글로벌 석유기업들 역시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데 이어 올 1분기에도 기록적인 실적을 거뒀다. 국영기업을 빼면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미국 엑손 모빌은 올 1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103% 늘어난 55억달러 순이익을 냈다.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막다른 길에 몰리는 듯했던 빅오일이 드라마틱하게 부활하고 있다. 에너지 전문 매체 오일프라이스닷컴은 “적어도 현재는 에너지 수요에 대한 충족이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보다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며 “세계는 여전히 석유와 가스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빅오일의 부활은 표면적으로는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예기치 못한 돌발 변수로 인한 유가 상승 덕이다. 하지만 그 이면엔 의욕만 앞선 세계 각국의 탄소 중립 정책과 ‘큰손’ 투자자들의 ‘말과 다른 행동’이 있다. 국제 기구들은 기후변화 위협에 대한 대응이 늦어진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빅오일 되살린 에너지 대란

유가 하락과 탈(脫)탄소 바람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빅오일을 회생시킨 에너지 가격 인상은 작년부터 시작됐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 가리지 않고 모든 화석연료 가격이 올랐다. 서부텍사스유(WTI)의 경우 작년 초 배럴당 40달러대이던 가격이 10월 80달러를 돌파했고, 지금은 110달러선을 넘나든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팬데믹 이후 경제활동이 점차 재개되면서 에너지 수요가 급증했다. 점점 잦아지는 이상기후 현상도 전 세계적으로 냉난방용 에너지 수요를 끌어올렸다. 작년 2월 북미 전역에는 30년 만에 한번 올까 말까 한 한파가 들이닥쳐 텍사스가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졌다. 여름엔 폭염이 몰아닥쳐 미국을 비롯해 이탈리아·터키·대만 등 10국이 지난해 사상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지난해 세계 에너지 수요는 전년 대비 4.6% 증가했다. 팬데믹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해도 0.5% 늘어난 것이다.

반면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플러스(+)가 감산 합의를 유지하는 등 공급에는 제동이 걸리면서 수급 불균형이 심화됐다. 에너지 전환을 한다며 그동안 화석연료에 대한 시설 투자를 줄인 것도 공급에 악영향을 미쳤다. 노르웨이의 에너지 정보 업체 라이스타드 에너지 데이터에 따르면, 작년 3분기 기준 미국 셰일 생산 업체들의 석유 및 가스 시추에 대한 재투자율은 46%로 사상 최저 수준이었다. 과거 평균 재투자율은 130%에 달했다.

여기에 국제 정세까지 갈등으로 점철되면서 에너지 가격 상승을 가속화했다. 지난해 중국은 호주와의 외교 갈등 이후 보복성 조치로 호주산 석탄 수입을 금지했다가 전력난에 빠지자 천연가스와 원유 수입을 늘리며 에너지 시장의 혼란을 부추겼다. 올해 2월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에너지 대란에 결정적 한방이 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각국 정부는 탄소 중립 약속을 뒤로한 채 에너지 안보를 명분 삼아 화석연료 투자를 재개 중이다. 친환경을 정책 목표로 내세우며 취임한 미국 바이든 정부는 그동안 중단시켰던 석유·가스 개발용 국유지 입찰을 지난 4월 재개했다. 미국 최대 유전인 텍사스주 퍼미안 분지의 신규 유정(油井) 시추 허가 역시 지난 3월 904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월 평균 400~500건에 달하던 허가 건수가 급격히 치솟은 것이다.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인 카타르는 지난해 300억달러(약 37조5800억원)를 투자해 착공한 LNG 공장 6개 건설 프로젝트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친환경 열풍에 숨죽이고 눈치만 살피던 빅오일은 투자를 확대하고 몸집을 키울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미국 환경단체 오일체인지인터내셔널(OCI)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BP·셰브론·에니·에퀴노르·엑손모빌·렙솔·셸·토탈에너지 등 8개 거대 석유기업은 앞으로 4년(2022~2025년) 내 개발 승인이 날 것으로 예상되는 200여 신규 석유·가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ESG 외치던 큰손들, 돈다발 싸들고 빅오일로

에너지 가격 인상에 여러 구조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상당 기간 에너지 가격 고공 행진이 이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지난 4월 “세계 석유 수요 정점은 오는 2024~2027년으로 전망된다”며 최소 2년 이상 석유 수요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빅오일과 화석연료가 화려하게 부활하자,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외치며 빅오일을 ‘악의 화신’ 취급해온 대형 금융사들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10조달러 넘는 자금을 운용하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불과 2년 전인 지난 2020년 보낸 연례 서한에서 처음 “기후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ESG 경영을 글로벌 기업들의 화두로 만들었고, 탄소 배출 사업으로 전환시키는 금융 압력의 출발점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 그해 12월 블랙록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 자산운용사들은 모여 탄소 중립에 부합하는 투자를 약속하는 국제그룹 ‘탄소중립 자산운용사 이니셔티브(Net Zero Asset Manager initiative·NZAMI)’을 출범했다. 무려 236개 투자사가 참여했고 이들이 운용하는 총 자본금(AUM)만 57조5000억달러(약 7경2881조2500억원)에 달했다. 마치 친환경 투자 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의 환경단체 리클레임 파이낸스가 지난 4월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미국과 유럽에 기반을 둔 30대 자산운용사는 올해 3월 기준 확장 계획이 있는 12개 주요 석유·가스 기업에 4680억달러를, 146개 석탄 기업에 825억달러(작년 11월 기준)를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당연히 여기에는 블랙록(1334억6600만달러)을 비롯해 뱅가드(1297억8400만달러), 스테이트스트리트글로벌어드바이저(838억6900만달러), 아문디(195억600만달러), JP모건(179억4300만달러) 등 유수의 자산운용사들이 대거 포함됐고 이들 모두는 NZAM의 회원이다. 블룸버그는 “기후 위기에도 펀드매니저는 화석연료 투자를 고수하고 있다”며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중 누구도 화석연료 기업에 새로운 석유 및 가스 프로젝트 개발을 중단할 것을 확실히 요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탄소 못 줄인 빅오일 규제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이 본격화된 뒤 각국 정부와 환경단체는 빅오일을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규정하고 각종 규제와 캠페인을 통해 자산 매각과 사업 모델 전환을 압박해왔다. 오염물질 배출 기업을 추적하는 기후책임연구소(Climate Accountability Institute)에 따르면, 1751~2010년 배출된 탄소와 메탄의 63%는 빅오일을 중심으로 한 90개 기업에서 비롯됐다. 이에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 기업 가즈프롬을 제외한 세계 10대 에너지 기업은 최근 몇 년 사이 모두 2050년을 탄소 중립 목표 연도로 내세우며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미인대회 같은 경쟁은 안 한다”며 친환경 전환에 손사래 치던 엑손 모빌마저 주주들의 압력에 못 이겨 올 1월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0)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규제가 탄소 저감에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지적도 있다. 가령, 빅오일들은 태양광·수소에너지·해양풍력플랜트 등 각종 친환경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투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노후화되거나 사업성이 떨어지는 유전을 매각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기후변화를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비영리단체 환경방어기금(EDF)이 지난 2017~2021년 발생한 인수·합병(M&A)과 자산 이전 등 에너지 사업 관련 거래 3000여 건을 분석한 결과, 수만 개의 석유·가스 유정(油井)이 상장 기업에서 주주 감독이나 공시 의무가 없는 비상장 민간 기업으로 넘어간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 5년 간 상장 기업에서 비상장 민간 기업으로 자산이 이전된 거래 건수는 총 886건에 달한다. 앤드루 백스터 EDF 이사는 “이런 거래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는 매각 의도와 관계없이 수백만톤의 탄소 배출량을 대중의 감시망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한다”며 “감독이 약화되면 환경 문제는 더욱 악화할 뿐”이라고 했다.

비상장 민간 기업으로 매각된 석유·가스 생산 시설은 실제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예컨대 셸과 토탈에너지, 에니가 작년 1월 사모펀드가 운영하는 TNOG에 매각한 나이지리아 남부 지역 유정은 매각되자마자 이전 대비 최대 10배에 달하는 플레어(시추 시 발생하는 불꽃)가 감지됐다. EDF가 석유·가스 분석 기업인 ESG 다이내믹스와 위성 데이터로 전 세계 가스 플레어를 추적하는 기업 캡테리오(Capterio)와 함께 분석한 결과다.

일부 국가는 빅오일에 대해 더 직접적이고 강경한 규제를 꺼내 들었지만, 이런 식의 규제 역시 글로벌 기업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옮겨 다니는 시대에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 미지수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은 작년 5월 헤이그에 본사를 둔 글로벌 석유기업 셸에 “비즈니스 모델이 파리기후협정에 명시된 목표를 위협함으로써 인권과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며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019년 수준에서 45% 줄이라고 명령했다. 이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20% 줄이겠다는 셸의 기존 목표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소송을 건 환경단체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러자 셸은 반년 뒤 본사를 영국으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 말과 행동이 다르다”

최근 빅오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에너지 없이 살 수 없는 인류의 현실과 탄소 중립의 이상(理想)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준다. 현실과 이상이 엇박자를 내며 공전(空轉)하는 사이, 기후 변화 대응이 늦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는 더 높아지고 있다. 지난 4월 발표된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제6차 보고서는 “인류의 지속가능 성장 및 지구 생물 멸종을 막기 위해 2030년까지 전 세계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2019년 대비 43% 이상 감축해야 한다”며 기후변화의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는 1.5도 상승 시기가 계속 앞당겨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유엔 세계기상기구(WMO)와 영국 기상청이 지난 10일 발표한 보고서는 향후 5년 내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 수준보다 1.5도 이상 높아질 확률이 48%에 달한다고 밝혔다. 7년 전만 해도 이 확률은 0%였다.

국제 기구들은 화석연료로의 회귀를 막기 위해서는 현실적 대안과 국제적 협력이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은 기후 위기를 촉진하는 원인에 대해 “일부 정부와 기업 리더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새 화석연료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은 도덕적·경제적 광기(狂氣)”라고 비판했다. 지구촌이 2050년까지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려면 새로운 석유·가스·석탄 공급 프로젝트에 투자해선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파티 비롤 사무총장은 지난 23일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 참석해 각국 대표단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부른 에너지 안보 위기를 핑계로 화석연료 의존도를 심화시켜서는 안 된다”며 “전 세계가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등 올바른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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