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최남단 티치노(Ticino) 지역에 지난 2020년 7월 독특한 형태의 설비가 들어섰다. 언뜻 보기엔 110m 높이의 거대 콘크리트 건물처럼 보이지만, 마치 헬리콥터 날개처럼 생긴 6대의 타워 크레인이 실시간으로 콘크리트 블록 쌓기와 해체를 반복한다. 콘크리트 블록에 따라 모습이 계속 바뀌는 이 시설의 정체는 바로 신재생에너지 저장소다.
스위스의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 기업) 출신인 에너지 볼트(Energy Vault)가 만든 이 설비는 중력(重力)을 활용해 에너지를 저장하는 ESS(에너지저장시스템)다. 완전 자동화된 AI(인공지능) 기반 제어시스템이 신재생에너지가 과잉 생산됐을 때 남는 전력을 활용해 개당 35톤짜리 콘크리트 블록 수백개를 옮겨 쌓고, 에너지 공급이 필요할 때는 쌓아 올린 블록을 내려놓는 방식으로 전력을 공급한다. 위치 에너지를 운동 에너지로 바꿔 발전기를 돌리는 것이다. 스위스 국가전력망과 연결된 이 설비의 최대 전력 저장 규모는 80MWh(메가와트시)로 2000~3000가구가 8시간 쓸 수 있는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탄소 중립이 세계 경제의 새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으면서 태양광과 풍력 같은 신재생에너지는 필수 산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밤낮 또는 날씨에 따라 에너지 공급량이 들쭉날쭉하다는 점(간헐성)은 신재생에너지가 가진 최대 취약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핵심 열쇠가 바로 잉여 재생에너지를 저장하는 기술이다. 2017년 설립한 에너지볼트는 이른바 ‘중력 전지’라는 아이디어로 주목받는 기업이다. 사우디 아람코, 소프트뱅크(비전펀드), 고려아연 등 큰손 투자자들로부터 상장 전까지 2억8000만달러(약 3517억원)를 투자받아 3년 만에 기술 상용화를 이뤄냈다. 같은 해 세계경제포럼(WEF)에서 ‘기술 개척자’로 선정됐고, 올해 2월에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를 통해 뉴욕증시 상장에도 성공했다.
◇콘크리트 블록으로 잉여 전력 저장
지난 7일 한국을 찾은 로버트 피코니(Piconi) 에너지 볼트 CEO(최고경영자)는 WEEKLY BIZ 인터뷰에서 “중력과 수력을 활용하는 양수발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물보다 밀도가 훨씬 높은 콘크리트 블록을 활용해 더 작은 부지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처음 아이디어를 내놓은 건 약 150개의 기업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기업의 원조 격인 아이디어랩의 빌 그로스 회장이다. 코인베이스·피카사·트윌리오 등 약 150개의 스타트업을 키워낸 그는 이 아이디어를 실현할 팀을 찾았고, 노키아와 다나허 등 여러 기업에서 경영진으로 일한 피코니를 CEO로 영입했다. 기술 개발은 또 다른 공동 창업자이자 신재생에너지 저장과 관련된 25개 특허기술을 보유한 공학기술자 안드레아 페드레티 CTO(최고기술책임자)가 맡았다.
피코니 CEO는 중력 기반 에너지 저장 설비가 리튬 이온 배터리에 비해 갖는 장점으로 경제성을 첫손에 꼽았다.
“리튬 이온 배터리는 시간이 지나면 성능이 떨어지는 열화(劣化) 현상이 발생하지만, 중력 전지는 그런 문제가 없습니다. 중력은 무한하고 같은 양의 에너지를 계속해 저장할 수 있죠. 우리 설비 수명은 최소 30년으로 장기적인 운영 비용 측면에서도 리튬 이온 배터리 대비 30~40% 정도 경제적입니다. 배터리가 없으니 냉각 설비도 필요 없고, 리튬이나 코발트 같이 가격이 높은 희소 광물도 불필요하죠. 기존 ESS의 문제 중 하나인 열폭주나 화재 위험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쓰는 콘크리트 블록은 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광산 찌꺼기나 석탄 연소 잔류물, 수명이 다해 해체된 풍력 터빈 날개 같은 폐기물들을 현지에서 조달해 만들고 있습니다.”
◇에너지 저장 기술은 진화 중
대규모 에너지를 저장하는 ESS는 크게 화학적·물리적·열역학적·전자기적 방식 등 4가지로 나뉜다. 최근 몇 년 새 많이 쓰이기 시작한 배터리 기반 ESS(BESS)가 대표적인 화학적 저장 방식이고, 대규모 댐을 이용한 양수발전이 대표적인 물리적 저장 방식이다. 잉여 전력으로 공기를 압축시킨 뒤 필요할 때 팽창시켜 활용하는 압축공기 에너지 저장 시스템(CAES)과 초전도 코일에 전류를 흘려 자기 에너지로 저장하는 초전도 자기 에너지 저장 시스템(SMES)은 각각 열역학과 전자기적 방식을 대표한다.
국제 재생에너지 비영리단체 REN21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기준 전 세계 에너지 저장량의 96.2%는 양수발전이 담당하고 있다. 최근 늘고 있는 배터리 기반 ESS의 비중은 아직 1.5%에 불과하다. 양수발전은 40~60년에 달하는 긴 수명에 안정성이 높고, 유지 비용이 저렴하며, 에너지 저장 용량이 가장 크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고저차가 있는 저수지 두 개를 필요로 하는 등 지형 제약이 크고, 대규모 댐 건설로 인한 산림 파괴와 수몰 및 보상 문제가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
피코니 CEO는 “중력 전지가 양수발전과 원리가 비슷하면서도 입지 제약은 훨씬 적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지 건축법이나 지질 상태에 따라 높이나 규모도 얼마든지 조절 가능하고, 고도 제한이 있다면 지하를 파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며 “설비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빠르면 8개월에서 길게는 18개월이면 건설 비용을 회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고 했다.
스위스에서 첫 기술 상용화를 마친 에너지볼트는 올해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시작해 지난 3월부터 중국 장쑤성 루둥 지역에 100MWh 규모의 설비를 건설 중이다. 올해 중순에는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500MWh 규모의 설비를 건설한다. 이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미국 오하이오주에서도 시설을 공급할 예정이다.
전 세계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늘어나면서 에너지 볼트처럼 새로운 방식의 에너지 저장 기술을 내세운 스타트업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빌 게이츠가 투자한 미국의 쿼드넷 에너지는 지하 펌프식 수력 저장소를 개발 중이다. 지하에서 퍼올린 물을 고압으로 지하 암석층에 저장하는 기술로, 기존 양수발전과 달리 높은 지형이 필요치 않은 게 특징이다.
소금을 에너지 저장 수단으로 개발 중인 기업도 있다. 구글에서 분사한 몰타(Malta), 스웨덴의 솔트엑스(SaltX), 덴마크의 하임(Hyme) 같은 기업들은 고온에서 녹인 용융염(熔融鹽)을 활용해 열에너지를 저장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소금은 수천 번 재활용이 가능하고 공정 중 배출되는 유해 물질이 없는 것이 장점이지만, 에너지 변환 시 효율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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