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이후 ‘BNPL(Buy Now Pay Later·선구매 후지불)’ 기업들은 핀테크 업계의 블루칩으로 급부상했다. BNPL은 소비자 대신 결제 업체가 먼저 물건값을 가맹점에 전액 지불한 뒤 소비자가 결제 업체에 대금을 분할 납부하는 방식이다. 전자상거래 수요 급증에 맞물려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BNPL 시장은 빠르게 몸집을 불렸다. 스웨덴 BNPL 업체 클라르나는 시장가치 460억달러(약 58조원)로 유럽 최대 유니콘(시장가치 10억달러 이상인 비상장 기업)이 됐고, 지난해 나스닥에 상장한 미국 BNPL 업체 어펌도 한때 시가총액이 470억달러(약 59조원)에 달했다. 호주 BNPL 업체 애프터페이는 지난해 호주 M&A 역사상 최고가인 290억달러(약 36조원)에 미국 핀테크 업체 블록(옛 스퀘어)에 인수되기도 했다.

BNPL 업체들 곡소리/일러스트=김영석

그러나 올 들어 금리가 급격하게 오르고,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BNPL 시장에 비상등이 켜졌다. 어펌 주가는 고점 대비 90% 하락했고, 애프터페이 적자 규모는 3억4550만달러(약 4355억원)로 전년(7920만달러)보다 300% 이상 늘었다. 시장가치가 300억달러(약 38조원) 수준으로 쪼그라든 클라르나는 최근 직원의 약 10%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투자은행 파이프샌들러의 케빈 바커 분석가는 블룸버그에 “최근 몇 년간 급성장한 BNPL 기업들은 대부분 저금리 시대에 탄생했다”며 “이제는 급격한 금리 인상과 높은 신용시장 변동성으로 역풍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급증하는 연체에 신음

BNPL 업체들은 신용카드 회사처럼 전통적인 신용 점수로 소비자를 평가하지 않는다. 신용 등급이 낮거나 소득이 불안정해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는 사람도 별도의 이자나 수수료 없이 BNPL의 할부 결제를 이용할 수 있다. BNPL이 급성장한 비결인 동시에 BNPL의 최대 취약점이다.

미 연방준비제도가 지난달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BNPL 사용자의 51%가 ‘물건을 구매할 유일한 방법’이라서 BNPL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답했다. 또 저소득·저신용자일수록 BNPL 이용률이 높았다. 지난해 연소득 10만달러(약 1억2658만원) 이상인 소비자의 BNPL 이용률은 7%에 그친 반면, 연소득 2만5000달러(약 3164만원) 이하 소비자는 12%가 BNPL 서비스를 이용했다. 또 자신의 신용등급을 ‘나쁘다’고 평가한 사람의 21%가 BNPL 서비스를 이용한 반면, ‘아주 좋다’고 평가한 사람의 이용률은 5%에 그쳤다.

더구나 소비자가 한 번에 여러 BNPL 업체를 이용할 수 있어 실제 상환 능력보다 과다한 채무를 떠안을 가능성이 높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BNPL로 발생한 빚은 신용 기록에 남지 않아 차용인(소비자)이 여러 BNPL 회사에서 빚을 끌어쓸 수 있다”며 “이 때문에 다른 금융회사들이 대출을 내줄 때 차용인의 기존 대출을 과소평가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호주증권투자위원회에 따르면 호주 BNPL 소비자의 15%가 BNPL 지출액을 갚으려 추가 대출을 받았다.

이런 특징 때문에 BNPL 업체들은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소비자 연체에 취약하다. 지불정보회사 프라우스터 데이터에 따르면 거래량이 10억달러(약 1조2560억원)에 이를 때마다 신용카드사가 기록하는 대손액은 27만달러(약 3억3900만원) 수준인 데 비해 BNPL업체는 1920만달러(약 241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부터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소비자들의 생활비 부담이 커지고, 각국의 경기 부양 프로그램도 종료되자 실제로 빚을 갚지 못하는 소비자들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어펌의 경우 30일 이상 연체된 미지불 금액이 올해 1분기 3.7%로 전년(1.4%)의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호주 BNPL 업체 ZIP의 대손충당금은 작년 하반기 1억4830만달러(약 1863억원)로, 전년(2950만달러)보다 403% 증가했다. 다이앤 스미스갠더 ZIP 회장은 지난달 주주총회에서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고객 수 증가보다 부실채권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지난 6~9개월 동안 BNPL 업계 전반이 거시경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시장조사기관 프리시던스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BNPL을 통한 전 세계 결제 규모는 1250억달러(약 160조원)에 이른다. 그동안 규제 없이 급성장한 BNPL이 부실화될 경우 금융 시스템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피치는 “차용인이 BNPL로 생긴 빚을 갚으려 신용카드나 다른 고금리 금융 상품을 쓰면서 리스크가 신용 시장 전체로 전이될 수 있다”고 했다.

◇애플까지 진출해 경쟁 심화

연체율이 높아지면서 BNPL 기업들은 이미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펌이나 ZIP은 고객에게 상품 값을 청구할 대금 채권을 묶은 자산유동화증권(ABS)을 금융권에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다. 어펌의 경우 사업 자금의 3분의 1을 ABS를 통해 조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연체율이 오르자 ABS의 기초 자산인 대금 채권의 신용도가 부실해지면서 발행 비용이 급등하고 있다. 금융 정보 플랫폼 핀사이트에 따르면 어펌의 4월 발행 ABS 가중평균 금리는 4.61%로 작년 2월(1.31%)보다 3.3%포인트 높아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직 업계 임원을 인용해 “부실채권이 증가하면 금융기관이 ABS 매입을 중단하거나, 훨씬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할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 IT 기업 애플까지 BNPL 시장 진출을 선언하면서 기존 업체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애플은 지난 6일 세계개발자콘퍼런스(WWDC)에서 애플페이를 이용해 상품을 구입할 때 대금을 6주에 걸쳐 4회 분납할 수 있는 ‘애플 페이 레이터’를 발표했다. 애플 페이 레이터 출시 소식에 어펌(-5.5%)과 ZIP(-14.3%) 등 기존 BNPL 업체 주가는 일제히 큰 폭으로 하락했다. 투자은행 스티븐스의 빈센트 케인틱 분석가는 “미국 가맹점의 85%가 애플페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어 기존 업계 플레이어보다 큰 경쟁 우위를 갖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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