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시장의 대학살’(CNBC) ‘파티가 끝났다’(월스트리트저널).
지난해 뜨겁게 달아올랐던 가상화폐 시장이 차갑게 식었다. 이 때문에 시장이 길고 긴 빙하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비관론이 흘러 나오고 있다. 가상화폐 대장주인 비트코인은 지난해 고점(6만8790달러) 대비 70% 떨어졌고, 이더리움은 지난해 11월 고점(4812달러)보다 80% 넘게 떨어졌다. 한때 2조9044억달러(약 3424조원)나 됐던 전 세계 가상화폐 시가총액은 9650억달러(약 1238조원)로 줄었다. 루나 사태로 시장의 신뢰도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다. 많은 전문가는 가상화폐 시장이 21세기 초 IT 거품 붕괴와 비슷한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최악은 오지 않았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 대부분의 가격이 폭락하거나 아예 휴지 조각이 됐지만, 아직도 바닥이 아니라는 비관론이 팽배하다. 독립 연구소인 앱설루트 스트래티지 리서치의 이언 하넷 최고투자책임자는 “비트코인 가격이 40% 더 떨어져 1만3000달러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미국 경제 주간지 포브스에 따르면, 신뢰할 만한 전문가 또는 매체 17곳이 “올해 비트코인 시장은 끝났다(dead)”는 평가를 내놨다. 가상화폐 시장을 이끌어가는 당사자들도 긴 겨울에 대비 중이다. 비트팜 등 가상화폐 채굴 기업들은 보유 중이던 비트코인을 대량 처분했고, 코인베이스·블록파이 등 거래소들은 대규모 인원 감축에 착수했다.
미 연준의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시중 돈줄이 마른 탓도 있지만, 시장의 신뢰를 상실했다는 게 더 근본적인 문제다. 지난 5월 가상화폐 ‘테라USD’와 ‘루나’ 폭락 사태에 이어 지난달에는 미국의 가상화폐 담보 대출 서비스 업체인 ‘셀시우스’가 고객 자산에 대한 출금을 중단했다. 가상화폐를 예금할 경우 18%대 이자를 주겠다며 고객 약 170만명을 유치했는데, 가상화폐 폭락에 놀란 고객들이 대규모 인출에 나서며 초유의 ‘뱅크런’이 벌어진 것이다.
디파이(DeFi)가 키운 전염성 강한 시스템 리스크도 그대로 남아 있다. 디파이란 탈중앙화(Decentralize)와 금융(Finance)의 합성어로, 정부나 기업 같은 기관의 통제 없이 투자자와 거래소가 직접 금융거래를 제공하는 금융시장을 의미한다. 중개소가 없어 수수료가 싸다는 장점 때문에 빠르게 성장했고, 그 결과 디파이 플랫폼에 예치된 금액은 작년 1월 약 27조원(230억달러)에서 올해 1월에는 약 274조원(2300억달러)으로 불어났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디파이 시스템으로 가상화폐 시장 상호 연결성이 높아졌고, 한 자산 가격이 내려가면 그 영향이 시스템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된다”고 분석했다.
주가보다 가격이 빠르게 폭락하면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金)’이라는 일각의 주장도 힘을 잃었다. 미국 투자 분석 기업 모닝스타의 메들린 흄 분석가는 “가상화폐가 2009년 등장해 10년 이상 사용됐지만 여전히 주류 위치에는 오르지 못했다”며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가상화폐에 대한 신뢰가 더욱 약해지고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가상화폐 시장의 본격 붕괴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파브라이 인베스트먼트 공동 대표인 모니시 파브라이는 “최악 상황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대부분 가상화폐가 빅 제로(Big Zero·아무런 가치도 남지 않는 것)라는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앞으로 10년 내에 가상화폐 가운데 99%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해온 브래드 갈링하우스 리플 최고경영자는 “현재 암호화폐 2만여 가지 중 결국 수십 가지만 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버블 붕괴, 우량 코인엔 약?
하지만 2000년대 초 닷컴버블 붕괴처럼 가상화폐 시장이 장기간 침체에 빠지더라도 비트코인·이더리움 같은 우량 코인은 살아남을 것이며, 거품 붕괴가 장기적으로는 가상화폐 시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낙관론도 존재한다. 버트런드 페레즈 웹3재단 최고경영자(CEO)는 “인터넷이 처음 유행하던 시기에는 가치가 없는 회사가 너무 많았다”며 “이 회사들이 정리된 것처럼 가치 없는 가상화폐가 정리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 하락장은 긍정적”이라고 했다.
블록체인 전문 투자사 블록타워캐피털의 창업자 아리 폴은 한술 더 떠 “비트코인은 닷컴 거품 붕괴 당시 살아남은 아마존과 같다”고 했다. 2000년 IT 거품 붕괴로 닷컴 기업 95%가 도산했을 때 애플이나 아마존 같은 기업도 생존의 위기에 몰렸지만 결국 살아남아 지금은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됐다. 서강대 경제대학원 김영익 교수는 “물론 가상화폐는 애플이나 아마존처럼 내재된 가치는 없지만, 비트코인 같은 우량 코인은 시장에서 투자 대상으로 믿음을 주기 때문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실제로 일부 가상화폐는 최근 가격 폭락과 상관없이 실물 경제에서 교환 수단으로서 저변을 넓히고 있다. 이미선 빗썸경제연구소 리서치센터장은 “아마존이나 비자카드, 트위터 등이 가상화폐를 결제 수단으로 허용하고자 준비하고 있고, 자국 통화에 대한 신뢰가 낮은 남미나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이미 결제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다”며 “개인 간 거래를 가능케 하는 블록체인 기술이 발달할수록 가상화폐 이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탈중앙화’를 외쳐온 가상화폐 옹호론자들은 역설적이지만 규제에도 희망을 걸고 있다. 정부 규제로 가상화폐가 제도권에 들어오면 시장 안정과 투자자 보호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지난 4월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가상화폐를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만큼 규제 대상에 포함하겠다”고 하자 비트코인을 포함한 시가총액 10위권 이내 가상화폐 가격이 일제히 상승한 데도 이런 까닭이 있다. 말레이시아 가상화폐 거래소 MX글로벌의 파드즐리 샤 CEO는 “정부 규제가 어느 수준인지 명확해지면 기관투자자들이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데 망설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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