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퀵커머스 업체 '고퍼프' 배달원이 고객이 주문한 물품을 배달하고 있다. /고퍼프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주문 즉시 배달해주는 퀵커머스 업체들이 수요 감소와 규제 앞에 흔들리고 있다. 성장 동력이었던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가는 데다 투자금이 마르면서 예전처럼 대규모로 할인 쿠폰을 뿌리기도 어려워졌다. 각종 소음 민원과 동네 마트를 죽인다는 비판 속에 각국이 규제에 나서고 있는 것도 업체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일각에선 “팬데믹이 퀵커머스에 대한 왜곡된 비전을 만들었다”며 사업의 수익성과 지속 가능성 자체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몸집 줄이는 퀵커머스 업체들

퀵커머스 시장은 코로나발 비대면 수요를 등에 업고 급격하게 성장했다.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늘면서 소비자들이 자연스럽게 온라인 장보기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모바일 데이터 분석 업체 비즈니스오브앱스에 따르면, 유럽 기반 ‘게티르’의 활성 이용자 수는 2019년 30만명에서 작년 350만명으로 2년 만에 열 배 이상 늘었다. 투자금이 물밀듯이 쏟아지며 일부 업체는 사업 시작 수개월 만에 유니콘(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에 등극하기도 했다. 독일 기반의 ‘고릴라스’는 작년 운영 9개월 만에, 경쟁사 ‘플링크’는 7개월 만에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유니콘 기업이 됐다.

마냥 장밋빛으로 보였던 업계 상황은 2년 만에 급변했다. 코로나로 멈춘 일상생활이 재개되고 인플레이션까지 겹치자 소비자들은 배달료를 내는 대신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업 확대를 위해 투자금을 대부분 쏟아부은 상태라 더 이상 신규 소비자 유치를 위해 큰돈을 쓰기도 어려워졌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고릴라스는 투자금 13억달러를 거의 소진하면서 사업 지속이 어려워지자 최근 경쟁 업체에 매각을 타진하고 있다. 앞서 지난 5월에는 본사 직원의 절반 가량인 300명을 해고했다. 미국 ‘고퍼프’도 지난 7월 직원 1500명을 해고한 데 이어 최근엔 기업공개(IPO) 계획을 보류했다. 즉시 배송을 위해 미국 전역에 깔았던 다크스토어(온라인 주문 처리만을 위한 매장) 600여 곳 가운데 76곳도 포기했다.

시장에서 철수하거나 아예 문을 닫은 업체도 늘었다. 작년 12억달러 기업 가치를 인정받은 ‘조크르’는 지난 6월 미국 사업을 접고 중남미 시장에만 집중하겠다고 했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잽’은 케임브리지와 맨체스터 등에서 철수하며 인력을 줄였다. 작년 미국 뉴욕에서 창업한 ‘바이크’는 추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지난 3월 파산을 신청했고, 비슷한 시기 ‘프리지 노모어’ ‘제로 그로서리’도 영업을 종료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여름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등장한 12개 이상의 식료품 즉시 배송 스타트업 가운데 현재 살아남은 곳은 겨우 절반 정도”라고 전했다.

시장조사 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벤처캐피털 업계가 퀵커머스 스타트업에 쏟은 투자금은 76억달러에 달했지만 올해는 36억달러(10월 현재)로 반 토막 났다. 피치북은 “식료품 즉시 배달 앱은 도심 곳곳에 다크스토어를 갖춰야 해 인프라 비용이 높고 이익을 내기가 훨씬 더 어렵다”며 “이런 상황에서 경기 침체로 투자자들의 관심이 수익성 있는 기업으로 옮겨 가면서 많은 퀵커머스 스타트업이 사업을 축소하거나 문을 닫아야 했다”고 분석했다.

◇수요 감소에 규제까지 첩첩산중

올 들어 업체마다 수익성을 높이려 지역 확장 대신 일부 대도시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선회하고 있지만, 이 또한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각국이 소음과 거리 혼잡, 동네 마트 보호 등을 이유로 퀵커머스 규제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퀵커머스 업체 '고릴라스' 온라인 배달 전용 매장 내부. /고릴라스

프랑스 파리 당국은 지난달 말 퀵커머스 업체 플링크에 하루 200유로의 벌금을 부과했다. 다크스토어를 창고로 등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는데, 일부 주거 지역 에선 창고 운영이 금지돼 있는 만큼 사실상 출점을 제한한 셈이다. 이에 앞서 올 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시 정부가 퀵커머스 업체들의 신규 다크스토어 출점을 1년간 금지하는 조례를 발표했다. 스페인 마드리드시는 지난 3월 주거 지역에서 350㎡ 이상 규모의 다크스토어 출점을 금지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일각에선 퀵커머스 시장 자체를 ‘팬데믹이 불러온 신기루’라고 본다. 애초에 수익을 내기 힘든 사업 모델인데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거치며 수요가 부풀려졌고, 너무 많은 업체가 적자를 감수하며 돈을 쏟아부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는 “최근 뉴욕에서 고퍼프 매출은 지난 5월 최고치 대비 27% 감소했다”며 “주문량 둔화, 수요 예측에 실패해 버려지는 재고, 낮은 고객 충성도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도심 곳곳에 다크스토어를 운영하는 데 큰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하면 대규모 적자로 이어지는 것도 문제다. 여러 건을 묶어 배달하기 어려운 만큼 일반 온라인 배송보다 배달료도 높은 편이다. 유럽 퀵커머스 업체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영국 가디언에 “배달원은 보통 주문당 6파운드 정도를 받아가지만 퀵커머스 업체가 실제 소비자에게 청구하는 금액은 2~3파운드 수준”이라며 “식료품은 마진이 매우 낮은 편이라 상품을 판 돈으로 배달료 손해를 상쇄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일부 업체는 배달료를 올리는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곧바로 사용자가 급감했다.

국내도 사정이 비슷하다. 2019년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이 30분 배송을 내걸고 B마트를 시작한 데 이어 작년 7월엔 쿠팡이 서울 강남권에서 ‘15분 배송’을 내건 쿠팡이츠마트를 내놓았고, 이마트도 지난 4월 강남에 도심 물류센터를 마련하고 퀵커머스 사업을 테스트하고 있다. 이 업체들은 퀵커머스 사업 실적을 따로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임차료와 인건비 부담에 대부분 큰 수익을 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빠른 배송을 위한 도심 물류센터를 갖추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트럭·오토바이 출입 같은 여러 조건을 만족하는 건물을 찾기 어려운 데다 물류센터로 활용하는 것을 꺼리는 임대인이 많다 보니 계약 성사가 거의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소상공인 단체를 중심으로 ‘골목상권을 죽인다’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박종대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관련 보고서에서 “퀵커머스는 (정기적인 수요가 아닌) 일시적·비정기적 수요라 시장 규모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물류센터와 배송 인력 등 고정비를 감안하면 퀵커머스 자체 사업으로 이익을 내기는 힘들어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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