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커피 프랜차이즈 스타벅스는 올 연말 미국에서 ‘스타벅스 오디세이’라는 새로운 멤버십 서비스를 선보일 예정이다. 스타벅스는 지금도 음료를 구매할 때마다 별 모양 디지털 스탬프를 주고, 12개를 모으면 무료 음료를 한 잔 주는 멤버십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새 멤버십 서비스에서는 스타벅스가 마련한 미니 게임이나 퀴즈에 참여하면 ‘여정 스탬프’라는 보상이 주어진다. 가치 있는 스탬프를 많이 모은 고객은 바리스타 특강이나 코스타리카 커피 농장 여행 같은 상품을 얻을 수 있다. 스타벅스는 스탬프 수집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한정판 스탬프도 만들고 희소성에 따라 포인트 가치도 차등 부여할 계획이다.
얼핏 보면 기존 별 스탬프 제도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여정 스탬프가 NFT(대체 불가능 토큰) 형태라는 점이다. 그래서 스탬프 소유권은 온전히 고객이 갖게 되고 자유롭게 사고팔 수도 있다. 만에 하나 화재로 스타벅스 서버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이 서버에 저장된 기존 마일리지 데이터는 사라지겠지만, 여정 스탬프는 블록체인에 분산 저장되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또 혹시나 스타벅스가 파산한다면 기존 스탬프는 교환 가치를 상실해 휴짓조각이 되지만, 여정 스탬프는 스타벅스 관련 수집품으로서 생명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스타벅스가 굳이 NFT를 활용한 새 스탬프를 도입한 것은 독점 콘텐츠로 고객의 자율적인 참여를 이끌어내 충성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이런 목적에 가장 적합한 것이 웹 3.0의 핵심 도구인 NFT라고 스타벅스는 판단했다. 브레이디 브루어 스타벅스 CMO(최고마케팅책임자)는 “우리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웹 3.0 공간에 진입하면서 회원과 스타벅스의 연결을 심화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말만 무성할 뿐 실체가 모호하던 웹 3.0이 기업들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스타벅스처럼 브랜드 가치가 높은 기업들은 주로 ‘21세기판 야구 카드’라 할 수 있는 NFT를 통해 고객의 참여와 충성을 이끌어내려 하고, 일부 스타트업은 기업 조직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데 웹 3.0을 활용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디지털 경제가 빠르게 확장되면서 웹 3.0을 이해하고 채택하는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있다”고 했다.
◇웹 3.0 실현시킨 블록체인
웹 3.0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데이터 소유, 그리고 중앙집권적인 기존 데이터 구조의 해체다. 1994~2004년 웹사이트 중심의 초창기 인터넷(웹 1.0) 시대 일반 사용자는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읽는 것만 가능했다. 댓글창 없는 뉴스 사이트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이후 블로그·페이스북·유튜브 같은 여러 양방향 플랫폼이 생기면서 데이터를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도 가능한 웹 2.0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대중이 만들어낸 각종 데이터는 여전히 플랫폼 기업 서버에 저장되고, 데이터를 독점한 기업들은 이를 다른 신사업 구축이나 타깃 광고에 활용하면서 빅테크(거대 기술기업)로 성장했다. 이처럼 중앙집권적인 기업이나 기관이 데이터를 독점하는 행태에서 벗어나 개인이 직접 데이터를 다루고 소유하는 평등한 인터넷 세상을 만들자는 게 웹 3.0의 기본 개념이다.
개념 수준에 머물던 웹 3.0을 실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가상화폐의 근간이기도 한 블록체인 기술이다. 블록체인은 네트워크 참여자들이 십시일반한 컴퓨팅 파워로 작동하기 때문에 특정 기업이 제공하는 서버 없이도 데이터를 분산 저장·처리할 수 있고, 보안성도 높다. 이더리움 같은 가상화폐에 내재된 프로그래밍 기능(스마트 콘트랙트)을 사용하면 사람의 개입 없이도 시스템 운영이 가능하다. 여기에 NFT가 개발되면서 개인의 데이터 소유와 거래도 용이해졌다.
기술적 기반이 마련되자 기업들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웹 3.0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나섰다. 특히 스타벅스처럼 브랜드 가치가 높거나 NFT로 활용할 IP(지식재산권)를 가진 서비스 기업들이 적극적이다. 디즈니, 구찌, 코카콜라, 아디다스, 버거킹, 월마트, 삼성, 네이버 등 많은 기업이 웹 3.0 시장에 발을 걸치기 시작했다. 가령 엔터테인먼트 공룡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지난 7월 신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6개사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중 3곳(폴리곤·플릭플레이·로커버스)이 웹 3.0 기술 개발 기업이다.
이들 기업이 유달리 웹 3.0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IP와 충성 고객을 기반으로 시장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 만화나 스타벅스 브랜드를 사랑하는 고객들에게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디지털 상품(NFT)을 만들어줄 경우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이 형성되면서 기업 브랜드나 제품에 대한 수요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계산이다.
IP 자원이 넘쳐나는 스포츠나 게임 업계에선 이미 이런 2차 시장이 활성화돼 있다. 미국 프로농구협회(NBA)와 대퍼랩스가 손잡고 2020년 내놓은 ‘NBA 탑샷(Top Shot)’이 대표적이다. NBA 경기 하이라이트 장면을 동영상 형태 NFT로 만들어 파는 플랫폼으로, 농구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110만명 이상의 등록 회원을 모았다. 지금까지 거래액도 10억3000만달러(약 1조4700억원)에 이른다. 과거 농구팬들이 마이클 조던 같은 NBA 선수가 담긴 카드를 수집했다면, 이제는 스타 선수들의 결정적인 경기 장면을 담은 한정판 영상 콘텐츠를 사고파는 시장이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게임 업계 역시 기존의 게임 머니와 아이템을 가상화폐와 NFT로 치환시키는 P2E 모델 개발에 한창이다. 가상화폐 경제와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환금성을 강화해 ‘게임을 즐길수록 실제 돈을 버는(Play to Earn)’ 구조를 만든다는 것이다. 베트남 스타트업 스카이마비스가 2018년 개발해 P2E 게임의 신호탄 역할을 한 ‘액시 인피니티’의 경우 게임 내 통화인 SLP코인과 AXS가 바이낸스와 업비트 같은 가상화폐 거래소에 상장돼 있어 쉽게 현금화가 가능하다. AXS의 경우 6일 기준 시가총액이 10억달러(약 1조4110억원) 이상으로 전체 가상화폐 중 51위를 차지하고 있다.
◇금융회사도 뛰어든 웹 3.0 실험
금융회사들도 웹 3.0 실험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특히 주목하는 건 중개기관 없이도 금융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대표적인 웹 3.0 기술로 꼽히는 디파이(De-Fi·탈중앙화 금융)를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JP모건과 협업해 싱가포르와 일본의 국채 및 통화를 토큰으로 만들어 블록체인 네트워크로 거래하는 데 성공했다. MAS는 “디파이 기술을 활용하면 금융 중개자 없이도 기업 간 거래가 가능해져 청산 및 결제에 드는 거래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그간 블록체인 기업이나 가상화폐 전문 투자자 중심으로 활용되던 디파이에 금융 당국과 주류 금융회사까지 뛰어든 것이다.
일부 금융회사는 보유한 현물 자산을 ABS(자산담보부증권)나 MBS(주택저당증권) 같은 전통적 유동화 방식 대신 웹 3.0을 통해 유통시키는 방안도 연구 중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2030년까지 토큰화된 유동성 자산 시장의 규모가 약 16조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다른 한편에는 웹 3.0 특유의 보안성에서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기업들도 있다. 이론상 위·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자산이나 개인 정보를 저장하고 전자 지갑이나 NFT 티켓으로 접속 권한을 부여하면 해킹 피해를 막으면서 통합 은행 계좌와 디지털 여권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실현되기만 한다면 개인 정보 관리와 자산 저장 방식에 대변혁이 일어나는 셈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최고경영자)가 거금을 들여 트위터를 인수한 배경에도 이런 목표가 깔려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트위터 인수에 5억달러(약 7100억원)를 지분 투자한 가상화폐 거래소 바이낸스의 패트릭 힐먼 CSO(최고전략책임자)는 “웹 2.0이 가진 과제들을 해결하고 웹 3.0 이슈를 다룰 샌드박스(실험장)로 활용하기 위해 유명 웹 2.0 플랫폼(트위터)을 인수했다”고 밝혔다.
◇기업 조직 운영에도 적용
또 다른 한편에선 탈중앙화라는 웹 3.0의 특성을 기업 조직 운영에 활용하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상사의 지시 대신 코드로 돌아가는 탈중앙화된 자율 조직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가 대표적이다. 기업은 보통 오너와 임원, 직원이라는 수직적인 관계로 구성되지만, DAO에서는 공동의 목표를 지닌 사람들이 블록체인으로 연결된 수평적 관계를 갖는다. 오너나 이사회 대신 스마트 콘트랙트로 규칙을 정하고 업무를 실행한다. 예컨대 ‘24시간 내 이 업무를 수행하면 일정량의 토큰을 지급하고, 그러지 않으면 토큰 보유량에서 일부를 빼앗는다’ 같은 조건을 설정하고 프로그램이 이를 자동 집행하는 식이다. 스마트 콘트랙트는 실행 이후엔 개발자라 해도 임의 조작이나 수정이 불가능하다.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활동을 할 때 주어지는 거버넌스 토큰은 조직 운영 방향이나 수익 구조 배분, 정책 등을 결정할 때 투표권 역할을 한다. 토큰 보유량이 많을수록 투표권 역시 커지는 방식이다. 기존의 협동조합 조직과 비슷하지만, 스마트 콘트랙트 덕분에 조합장 같은 관리자가 필요 없고 토큰 인센티브가 있다는 점에서 더 영리적이다. 거래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되는 블록체인 원장 덕분에 회계감사도 필요 없다.
패션 브랜드 메타팩토리(MetaFactory)는 DAO를 통해 영리 기업 운영이 실제로 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회사 디자이너들이 여러 디자인 시안을 올리면 ‘로봇’이라 불리는 거버넌스 토큰을 가진 구성원들이 투표로 생산할 디자인을 결정한다. 이렇게 결정된 디자인은 독일 베를린과 미국 뉴욕에 있는 소규모 공장으로 전달돼 실물로 제작된 뒤 온라인으로 판매된다. 판매된 수익금은 스마트 콘트랙트가 정한 대로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자동 분배된다.
불특정 다수에게서 자금을 모금하는 데도 DAO가 유용하게 활용된다. 13개만 남아 있는 미국 헌법 초판 인쇄본이 지난해 11월 소더비 경매에 나오자 “개인 수집가의 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헌법을 구출해 내자”는 목표로 컨스티튜션 DAO가 만들어졌고, 약 1만7000명이 참여해 일주일 만에 4000만달러(약 570억원) 이상을 모금했다. 결과적으론 4320만달러를 부른 헤지펀드 거물 켄 그리핀 시타델 창업자에게 밀려 낙찰 받지 못했지만, 네티즌들이 억만장자에게 대항했다는 사실만으로 화제를 모으며 DAO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유명세를 탄 DAO는 올해 들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컨설팅 기업 스냅샷랩스에 따르면, 전 세계 DAO 규모는 올해 6월 기준 약 6000개가 돼 1년 전(약 700개)의 9배 가까이로 급증했다.
◇아직은 갈 길 먼 웹 3.0
하지만 웹 3.0이 내세우는 비전이 매우 과장됐거나 신기루에 가깝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잭 도시 트위터 창업자는 지난해 12월 “당신(네티즌)은 웹 3.0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며 “벤처캐피털과 그들에게 돈을 대는 투자자들이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가령 스타벅스가 도입한 새로운 스탬프는 요란하게 웹 3.0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기존 쿠폰과 별반 다를 게 없다. P2E를 내세우는 게임도 소비자의 지갑을 더 열기 위한 상술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탈중앙화 금융을 내세우는 디파이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자산 운용 업계 전문가들은 “디파이 파생상품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기초 자산이 뭔지 모르게 되는 경우도 많다”며 “자칫 담보 가치 하락이 스마트 콘트랙트에 의한 연쇄 청산으로 이어지면 금융위기급 혼란을 낳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웹 3.0을 표방한 조직 운영 시스템인 DAO도 이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뭐든 결정할 때 구성원의 투표 과정을 거치다 보니 의사 결정이 느리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 탈중앙화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더 중앙집권적이고 금권적인 측면도 있다. 거버넌스 토큰 보유량에 따라 지분이 커지는 구조를 취할 경우 대량의 토큰을 가진 소수의 고래가 시장과 커뮤니티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렘 코닝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컨스티튜션 DAO의 경우 참여자의 상위 1%가 전체 토큰의 66%를 보유했다”며 “미국 자본시장에서 상위 1%가 자산의 27%를 보유한 것과 비교해도 소수 쏠림 현상이 유독 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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