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킹스마운틴 지역에는 50m 깊이 연못이 하나 있다. 이 일대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리튬 채굴장이 있던 곳이지만 문을 닫아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최근 미국 리튬 공급 업체인 앨버말이 이 폐광(廢鑛)에서 다시 리튬을 채굴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주로 호주·남미에서 리튬을 생산해오다 미국 정부의 지원책을 보고 방향을 튼 것이다. 앨버말은 지자체 허가와 채굴 준비 등을 거쳐 2027년쯤 연 5만톤 규모의 생산을 재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니켈과 리튬, 코발트 등 2차 전지 핵심 원료를 둘러싼 각국의 쟁탈전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강대국들은 외교력과 경제력을 총동원해 해외에서 수입처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거는 한편, 자국 생산을 독려하기 위해 그동안 금과옥조로 여겨온 환경과 노동 규제마저 완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도네시아와 아르헨티나, 칠레 등 자원 보유국들은 20세기 중동이 석유로 그랬던 것처럼 배터리 원료를 자원 무기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20세기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면 21세기는 핵심 광물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정의될 것”이라고 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세계 1, 2위를 다투는 배터리 생산국이면서도 원료 확보 경쟁에서는 뒤처지고 있다는 우려 목소리가 높다.
◇불붙는 자원 보호주의
광물 생산국들은 더 이상 돈만 준다고 해서 광물을 무한정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핵심 광물 중요성이 커지면서 이들은 자원을 무기화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고 있다. 전 세계 리튬 매장량(현재의 기술력과 경제성을 고려했을 때 생산 가능한 총량)의 82%가 칠레(44%), 호주(22%), 아르헨티나(9%), 중국(7%) 등 4국에 집중돼 있고, 코발트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매장량이 절반 이상이다. 니켈은 상대적으로 여러 지역에 고르게 매장돼 있지만 생산만 놓고 보면 인도네시아(37%), 필리핀(14%), 러시아(9%) 등에서 주로 이뤄진다. 미 포린폴리시는 “광물 시장이 아직 석유나 천연가스에 비해 작고 상대적으로 더 적은 수출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 변동성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지난 3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니켈 가격이 하루 만에 60% 폭등하면서 런던금속거래소가 니켈 거래를 중단한 것이 이런 변동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예다.
세계 최대 니켈 생산국인 인도네시아는 최근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유사한 형식의 니켈 동맹을 추진하고 있다. 바흐릴 라하달리아 투자부 장관은 지난달 17일 성명을 통해 “OPEC과 같은 니켈 생산국들을 위한 특별 기구를 결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달 발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선 또 다른 니켈 생산국인 호주·캐나다 정부와 만나 기구 설립에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바흐릴 장관은 “지금은 배터리 원료를 생산하는 국가들이 부가가치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다”며 “니켈을 비롯해 광물 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이 조직을 갖추면 생산을 조율하면서 고르게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인도네시아는 이미 니켈의 원광 수출을 금지하며 산업 보호에 나섰다. 채굴한 니켈을 자국 안에서 제품 형태로 가공해 가져가라는 것이다.
자원 통제력을 강화하고 싶어 하는 나라는 인도네시아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 리튬 자원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리튬 삼각 지대’라고 하는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는 리튬 생산과 가격 책정 방식을 공동으로 논의하는 ‘리튬판 OPEC’을 추진 중이다. 현재 리튬을 일부 생산 중인 브라질과 탐사·개발 초기 단계인 멕시코·페루도 이 기구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원 개발을 국유화하겠다는 선언도 잇따르고 있다. 멕시코는 지난 4월 리튬 자원을 국유화한 데 이어, 8월엔 리튬 채굴 국영기업을 설립했다. 자원 탐사를 원하는 민간 기업은 무조건 국영기업과 협력해야 한다. 테아 리오프랑코스 프로비던스칼리지 교수는 “남미 국가가 힘을 합치면 리튬 확보를 원하는 글로벌 광산 기업이나 배터리·자동차 기업을 상대로 협상 교섭력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
◇본격 자원 확보 경쟁 나선 서구
미국을 비롯한 서구는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배터리용 광물 시장의 주도권을 되찾아오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국은 흑연(82%) 정도를 제외하곤 자국 생산량은 많지 않지만 세계 각지에서 원광석을 가져와 제련·가공한 후 다시 수출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배터리용 광물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예컨대 리튬은 생산량에선 중국 비율이 14% 정도지만, 제련·가공 단계로 오면 65% 정도까지 뛴다. 코발트는 70%, 망간은 90%에 달한다.
이는 중국이 일찌감치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낙점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호주, 콩고민주공화국(DRC), 칠레 등 주요 생산국 광산과 관련 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온 결과다. DRC에서 중국으로 수입되는 코발트 광석의 3분의 1이 중국 소유의 광산·제련시설에서 생산된다. 리튬 분야에서도 남미 지역 등에서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채굴 업체를 지속적으로 인수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중국 톈치리튬은 지난 2018년 칠레 최대 리튬 업체인 SQM의 지분 24%를 사들였고, 중국 최대 리튬 화합물 생산 업체인 간펑리튬은 올해 아르헨티나 리튬 염호 2곳의 개발 권리를 갖고 있는 리테아를 9억6200만달러에 인수했다.
그동안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자원 외교에 주력해온 만큼 남미·아프리카 정부와의 관계도 돈독한 편이다. 올해 볼리비아 국영기업이 진행한 리튬 채굴 사업 입찰 경쟁에서는 중국 기업 네 곳과 러시아 한 곳, 미국 한 곳만이 최종 후보로 선택됐다. 지난 6월 유력한 승자 가운데 하나로 점쳐졌던 미국 기업 에너지X가 자격을 박탈당하면서 사실상 중국 기업 판이 돼 버린 것이다.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안전한 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 에너지부는 지난 10월 배터리 핵심 원료를 공급하는 20기업에 28억달러를 지급하는 계획을 내놨다. 이를 통해 연간 200만대의 전기차에 공급 가능한 배터리용 리튬, 120만대에 공급할 흑연, 40만대에 공급할 니켈을 자국에서 생산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 정부는 “미국과 동맹국은 현재 청정 에너지 전환에 필요한 광물과 배터리 소재를 충분히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국이 광물 채굴·가공·재활용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전기차 개발과 도입에 차질이 생기고 신뢰하기 힘든 외국 공급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난 8월 통과돼 내년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도 미국,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국가에서 채굴‧가공한 배터리 광물을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해야만 혜택을 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업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호주에 기반을 둔 코발트·니켈 생산 업체 저부아글로벌은 지난 10월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코발트 채굴을 재개했다. 미국에서 코발트 생산이 이뤄지는 것은 지난 1994년 이후 28년 만에 처음이다. 또 다른 호주 회사인 ‘사우스32′ 역시 최근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망간 광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유럽연합(EU)은 ‘핵심원자재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광물 채굴부터 제련·가공·재활용 단계에 이르기까지 민간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각 프로젝트 참여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 등이 담길 것으로 전망된다. EU 차원의 기금 조성도 거론된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9월 법안을 제안하면서 “리튬과 희토류가 곧 석유와 가스보다 더 중요해질 것”이라며 “필수 원자재에 대한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접근이 불가능하다면 최초의 탄소 중립 대륙이 되려는 우리의 야망도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U는 리튬·코발트·흑연과 같은 중요 원재료 생산에 관해서는 환경 승인 시간을 단축하는 등 규제 장벽을 낮추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광물을 둘러싼 쟁탈전이 치열해지자 최근엔 배터리 업체뿐 아니라 완성차 기업까지 광물 자원 확보에 직접 나서고 있다. 세계 최대 전기차 업체 테슬라는 배터리 공급망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텍사스주에 배터리용으로 사용되는 수산화리튬 정제 시설을 짓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머스크는 지난 4월 트위터에 “리튬 가격이 미친듯이 오르고 있어 우리가 직접 채굴·제련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4위 완성차 업체인 스텔란티스는 지난 10월 호주 광산 업체 GME리소스와 니켈·코발트 공급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 같은달 미국 완성차 업체 GM도 니켈·코발트 등을 확보하기 위해 호주 광산 업체 퀸즐랜드퍼시픽메탈에 6900만달러를 투자했다. 중국 BYD(비야디)는 아프리카 리튬 광산 6곳의 개발권 확보를 추진 중이고, 니오 역시 호주 리튬 광산 회사 ‘그린윙 리소스’의 지분 12%를 사들였다. GM 자재 구매 담당 임원인 탄야 스킬톤은 10월 한 콘퍼런스에서 “이것은 경쟁이자 제로섬 게임이며 자원은 유한하다”며 “어느 회사가 광물을 갖느냐에 따라 업계의 승자와 패자가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
◇”장기 전략 필수, 재활용 기술도 키워야”
우리나라는 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같은 세계적 배터리 제조 업체를 보유하고 있지만, 원료 확보 경쟁력은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 블룸버그는 리튬 이온 배터리 공급망을 보유한 30국의 경쟁력을 평가하며 한국을 공동 6위에 올렸다. 배터리 제조 분야에선 중국에 이어 2위였지만, 원자재 수급(17위)과 환경 분야(10위)에서 점수가 낮았다. 특히 갈수록 높아지는 중국 의존도가 문제로 지적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 1~7월 흑연의 중국 수입 비율은 91%, 코발트는 90%, 리튬은 64%에 달한다. 일본의 대(對)중국 리튬 수입 비율이 2019년부터 올해까지 50%대에 머무는 동안 한국은 44%에서 64%로 껑충 뛰었다.
전문가들은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 시행과 맞물려 수입처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김경훈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국은 과거 자국의 희토류를 일본과 분쟁 벌일 때 전략적으로 활용한 전례가 있다”며 “최근 막대한 투자를 통해 주요 자원에 대한 영향력도 넓혀가고 있는 만큼 자원 무기화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호주와 캐나다, 아르헨티나 등이 대체 수입처로 거론된다.
장기적인 전략도 필요하다. 김유정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광물자원전략연구센터장은 “광물 가격이 높을 때만 자원 개발 이야기가 쏟아지고, 막상 가격이 떨어지면 못 견디고 떨어져 나오는 식으로는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며 “공급망 확보는 지속적으로 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일본의 석유천연가스금속광물자원기구(JOGMEC)와 같은 독립 지원 기관을 설치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단순한 광물 확보를 벗어나 중국에 집중돼 있는 제련 능력을 분산하는 것도 주요 과제로 꼽힌다.
우리나라도 민간 차원에서는 1~2년 전부터 핵심 광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금씩 투자에 나서고 있다. 포스코는 작년 5월 호주의 니켈 광업·제련 전문 회사 ‘레이븐소프’ 지분 30%를 2억4000만달러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SK온은 2차 전지 소재 기업인 에코프로 등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니켈 공장을 세울 예정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지난달 민관 프로젝트 공동 발굴·추진, 금융 지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2차 전지 산업 혁신 전략’을 발표하는 등 대응에 나서고 있다. 다만 아직 구체적인 방안보단 선언적 형식에 그치고 있는 데다, 중국·일본 등에 비하면 한참 뒤처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 쓴 배터리에서 리튬 같은 원료를 추출하는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도 우리나라가 반드시 키워야 할 분야로 꼽힌다. 시장조사 전문 업체 SNE 리서치는 글로벌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이 올해 4억달러에서 2040년 574억달러로 급속도로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세계적인 전기차 판매 증가세와 배터리 수명을 감안하면 5~10년쯤 지나면 폐배터리가 본격적으로 배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과 교수는 “신규 광산 개발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 세계적으로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량을 줄이라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에 재활용 시장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모든 배터리 수요를 감당할 순 없겠지만 우리나라 같은 자원 빈국은 특히 이 시장을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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