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추수감사절(11월 넷째 주 목요일) 다음 날을 뜻하는 블랙프라이데이는 세계 최대 소비국인 미국의 소비 심리를 보여주는 가늠자다. 블랙프라이데이를 기점으로 미국 개인 소비 지출의 25~40%가 11~12월에 집중된다.
올해 연말 쇼핑 시즌의 열기는 예년만 못 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인플레이션(지속적 물가 상승)과 경기 침체 우려 때문이다. 미국 대형 은행 웰스파고의 수석 경제학자이자 매년 ‘연말 소비 전망’ 보고서를 내는 팀 퀸란은 “인플레이션은 올해 가계의 가장 큰 문제”라며 실질임금 감소 효과로 연휴 판매가 둔화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미국 쿠폰서비스업체 리테일미낫이 지난 10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51%가 인플레이션에 “구매를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런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미국 상위 100대 소매업체 중 85개 기업의 판매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어도비 애널리틱스는 블랙프라이데이 당일(11월 25일) 미국 소비자들의 온라인 쇼핑 지출액이 총 91억2000만달러(약 11조8700억원)로 사상 처음 90억달러를 넘겼다고 밝혔다. 전년 대비 2.3% 증가한 실적이다. 오프라인 매장에도 손님들이 넘쳐났다. 시장 조사기관인 센서매틱 설루션스는 추수감사절(24일) 매장을 직접 찾은 인원이 지난해 대비 19.7%, 블랙프라이데이 당일에는 2.9% 증가했다고 밝혔다.
예상치 못한 미국의 연말 소비 호황은 글로벌 금융시장 참여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기고 있다. ‘연말 소비 둔화→인플레이션 둔화→기준금리 인상 속도 조절’이라는 시나리오가 통째로 어그러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을 제외한 유럽과 중국 등 다른 주요국은 예상대로 연말 소비가 부진한 흐름을 보이면서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이라는 변수까지 추가돼 글로벌 경제의 셈법이 더 복잡해졌다. WEEKLY BIZ가 미국의 연말 특수가 가진 의미와 여파를 따져봤다.
◇소비 여력 강한 미국 소비자들
미국의 연말 소비는 반짝 흥행으로 끝나지 않는 분위기다. 블랙프라이데이 3일 뒤 이어진 대규모 온라인 판촉 행사인 사이버먼데이도 흥행 가도를 달렸다. 지난달 28일 하루 동안 미국 소비자들은 113억달러(약 14조5900억원)를 쓴 것으로 추산됐다. 작년 지출액보다 5.8%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전미소매협회(NRF)에 따르면, 올해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11월 24~28일) 온·오프라인 쇼핑객 수는 총 1억9670만명으로 전년 대비 1700만명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2017년 이후 최대 규모로, 팬데믹 전인 2019년(1억6530만명)보다 3140만명 많다.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박싱데이(크리스마스 다음 날) 특수까지 합치면 올해 11~12월 소매 판매가 전년 대비 6~8% 증가한 9426억~9604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NRF는 전망했다.
막대한 재고가 쌓인 제조업체와 유통업체들이 제 살 깎기식 할인을 최대한 자제했는데도 이런 실적이 나온 것이어서 더욱 이례적이다. 세일즈포스에 따르면 올해 블랙프라이데이 평균 할인율은 30%가량으로 집계됐다. 공급망 혼란으로 물건이 없어서 못 팔았던 작년(28%)보다 약간 높지만, 팬데믹 이전인 2019년(33%)에 비하면 오히려 낮은 수준이다.
그런데도 연말 소비가 호황을 보이는 까닭은 미국 가계가 가격 상승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연방준비제도(Fed)가 지난 10월 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체 가구의 소비 여력을 나타내는 초과 저축 규모는 올해 중반 기준 1조7000억달러(약 2197조42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 하위 50% 가구로 좁혀도 초과 저축액은 약 3500억달러에 달한다. 가구당 5500달러(약 720만원)의 여유 자금을 가진 셈이다.
초과 저축의 원천은 팬데믹이 한창일 때 미국 정부가 뿌린 현금이다. 이미 지난 2020년 두 차례 경기부양책으로 인구 1인당 평균 1800달러를 지급한 미국 정부는 작년 3월 1조9000억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또 시행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부양책으로, 1인당 돌아가는 현금만 1400달러에 달했다. 연준은 “초과 저축액 대부분은 2020~2021년 재정 부양책에 의한 소득 증가에 기인한다”며 “올 상반기 대규모 주가 하락을 감안해도 미국 가계 순자산 규모는 2019년 대비 거의 25조달러 증가했다”고 밝혔다. 일자리가 넘쳐나는 고용시장도 소비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미 의회예산국(CBO) 추정에 따르면, 올 3분기 기준 부족한 일손은 35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美 소비 강세, 글로벌 악재 될까
미국 GDP(국내총생산)의 70%를 차지하는 소비의 호황은 통상 세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원동력이다. 미국에 물건을 수출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공장 가동률이 높아지고, 물동량이 늘어나고, 원자재 수요가 늘어난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11월 미주 컨테이너 주간 공급량은 59만4000TEU로 전년 동기 대비 10.1% 감소했다. 12개월 중 처음으로 50만TEU대로 떨어지며 연중 최저를 기록했다. 이승훈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에 쌓인 재고가 워낙 많다 보니 연말 미국 소비가 호황을 보이더라도 미국 내 재고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을 뿐 대미 수출국들의 실적이 곧바로 좋아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연말 소비 증가는 피크아웃(정점 후 하락) 조짐을 보이던 인플레이션을 다시 자극해 글로벌 경제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미국 공영라디오 NPR은 “블랙프라이데이 쇼핑객들이 매장으로 향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커질 것 같다”며 “연준이 미국 경제를 식히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시기지만 정작 사람들은 신용카드 사용액을 늘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경제의 최대 관심사인 금리 측면에서도 소비 강세는 악재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소비 호황이 경기 침체 가능성을 낮춰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연준은 지난달 2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내년 경기 침체 가능성을 처음 언급하며 금리 인상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이르면 오는 12월 중순 FOMC 회의에서 금리 인상 속도를 완화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연말 소비가 강하게 나타나면서 미국의 금리 인상 강도와 지속 기간이 당초 예상보다 강하고 길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김윤정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 소비 강세가 장기 지속된다면 인플레 측면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기준금리 인상은 한국 같은 국가 입장에선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바깥은 소비 침체
미국의 연말 소비 호황으로 디커플링 징후가 더욱 뚜렷해진 것도 세계 경제에 부담이다. 3분기 주요국 대부분이 성장률이 뚝 떨어지거나 역성장한 것과 달리 미국은 2.9%(전기 대비 연율) 성장하며 강한 반등세를 나타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나 홀로 연말 소비 호황으로 ‘미국과 그 외 국가’ 간 온도 차가 더 극심해졌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인 중국만 해도 코로나 봉쇄와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연말 소비가 찬물을 끼얹은 듯 얼어붙었다. 매년 11월 11일 열리는 중국 최대 쇼핑 대목 광군제(光棍節)는 경기가 냉각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알리바바, 징둥, 핑둬둬 등 중국 주요 전자상거래 업체들은 이례적으로 매출 실적까지 비공개 처리했다. 중국 IT 전문 조사기관 신툰(星圖數据)은 광군제 당일 매출이 3076억위안(약 56조68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2%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중국 택배 업체들의 물동량 역시 2010년 이후 처음 급감했다. 중국 국가우정국의 모니터링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11월 1~11일 중국 전역의 우편 택배 업체는 42억7200만개의 특급 우편물을 처리한 것으로 집계됐다. 작년과 비교하면 10.6% 감소한 수치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러·우 전쟁이 촉발한 에너지 공급난과 미국보다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유럽은 크리스마스 트리 조명까지 어둡게 해야 할 정도로 생활비에 쪼들리고 있다. 영국은 이미 이달 중순 경기 침체에 진입했다고 선언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11월 실시한 조사에서도 미국과 유럽, 호주 등 9국 가운데 미국 소비자들만 올해 지출을 늘릴 계획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소비자들이 올해 지출을 6% 늘리겠다고 한 반면, 영국·독일·스페인 같은 유럽 국가의 소비자들은 지출을 13~18% 줄이겠다고 답했다.
한국도 연말 대목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분위기가 썰렁하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올 4분기 국내 소매유통업계 경기 전망지수는 73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금융 위기였던 2009년 1분기 때와 같은 수준이고, 2002년 집계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았던 팬데믹 시기(66)에 이어 둘째로 낮다. 10월 29일 터진 이태원 참사 역시 연말 소비 열기를 식히는 역할을 했다. 사회적인 애도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라 불리는 ‘코리아 세일 페스타’ 개막 행사를 비롯해 각종 지역 축제가 취소됐고, 유통·판매사들도 마케팅을 대폭 축소했다.
이 때문에 각국 재정·통화 당국자들은 미국의 금리 인상과 자국의 경기 침체 사이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내수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통화 정책을 느슨하게 가져가다간 자금 유출과 통화 가치 하락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미국에 발맞춰 금리를 인상했다가는 경기와 내수 침체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 레이팅스의 브라이언 쿨튼 수석 경제학자는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금리 인상) 결투를 벌여야 하지만, 그건 각국 경제 성장에 좋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소비 강세 지속성이 관건
결국 미국의 소비 강세가 얼마나 지속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 가계의 초과 저축액을 바탕으로 소비 증가세 지속 가능 기간을 9~12개월로 추산했다. 이런 예상대로 소비 강세가 유지되면 정책금리 목표 역시 상향 조정될 수밖에 없다. 파월 의장은 최근 연설에서 “기준금리 최종 수준은 지난 9월 생각했던 것보다 다소 높아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당초 4%대 수준으로 예측됐던 기준금리 상단이 5%를 넘어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현재 기준금리가 4%인 걸 감안하면 내년에도 상당한 수준의 금리 인상이 추가로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지낸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 기준금리가 내년에 5.25%까지 이를 것으로 본다”면서 “상황에 따라 그보다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고 예측했다.
물론 미국 소비 심리가 꺾일 가능성도 있다. 미국 가계를 위협하는 신호 역시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뉴욕 연준의 별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분기 기준 미국 가계 부채는 전년 동기 대비 1조2620억달러(8.3%) 급증한 16조5100억달러에 달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신용 대출이 빠르게 늘고 있다. 9월 말 기준 미국 신용카드 사용액은 9300억달러로 전년 대비 15% 급증해 20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고용 호황과 임금 증가가 배경으로 꼽히는데, 고용 호황이 꺾이면 빚을 내 소비하는 분위기도 빠르게 식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지난달 민간 비농업 신규 일자리가 2021년 4월 이후 가장 적은 22만1000개에 그치는 등 고용 둔화가 가시화되고 있다.
중국의 코로나19 확산과 강도 높은 제로 코로나 정책도 글로벌 공급망 악화시켜 미국 소비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가령 애플의 최대 생산기지인 정저우 공장에서 직원들의 반(反)정부 시위가 일어나 최신 기종 스마트폰인 아이폰14 프로가 600만대가량 생산 차질이 빚어졌다. 뉴욕타임스는 “세계 2위 경제 대국인 중국에서 코로나19 방역에 반대하는 시위가 증가해 세계 경제에 새로운 불확실성과 불안정 요소가 되고 있다”며 “중국이 수년간 ‘세계의 공장’이자 세계 경제의 엔진 역할을 했던 만큼 그 혼란이 다른 곳으로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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