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용자산이 9510억달러(약 1238조원)에 이르는 세계 최대 사모펀드 블랙스톤은 지난 8월 미국의 대학생용 아파트 건설·관리 업체 ‘아메리칸 캠퍼스 커뮤니티’를 약 130억달러(약 17조원)에 인수했다. 금리 인상으로 거래가 줄고 집값이 하락하면서 미국 부동산 시장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블랙스톤은 이어 10월 말에는 산업 자동화 전문 기업 에머슨으로부터 기후 기술 관련 부문을 140억달러에 인수했다.
캐나다에 기반을 둔 인프라 전문 사모펀드 브룩필드는 지난 7월 66억달러를 들여 도이치텔레콤의 통신탑 지분 51%를 인수했다. 인텔이 애리조나에 새로 짓는 반도체 공장에도 총투자비 300억달러 중 49%를 대기로 했다.
금리 인상으로 인수합병(M&A) 시장이 얼어붙고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사모펀드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 막대한 현금을 쌓아두고 있던 사모펀드들이 헐값에 시장에 나온 매물들을 하나씩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 경제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넉넉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사모펀드들이 이번 하락장에서 최고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4200조 총알 장전한 사모펀드
사모펀드는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모은 자금을 투자해 수익을 내는 펀드를 말한다. 대중적인 펀드가 아니어서 운용에 특별한 제한이 없고, 익명성이 보장되며, 다양한 방법으로 고수익을 추구한다. 기본적으로는 국부펀드나 연기금 등 전 세계 기관투자자로부터 자금 운용을 위탁받아 기업을 인수한 뒤 가치를 높여 되팔거나, 덩치가 큰 부동산 또는 인프라에 주로 투자한다. 미국 데이터 분석기업 피치북에 따르면 전 세계 사모펀드 시장 규모(부동산·인프라 포함)는 2012년 4조8000억달러(약 6250조원)에서 지난해 12조9000억달러(약 1경6821조원)로 커졌다.
올 들어 자금 유입 속도가 줄긴 했지만, 글로벌 대형 사모펀드에는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큰손들의 발길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3분기 블랙스톤은 450억달러 신규 자금을 유치했고, 아폴로 글로벌은 340억달러, KKR은 130억달러, 칼라일은 60억달러를 새로 조달했다. 지금까지 비축해둔 ‘드라이파우더(Dry Powder)’도 넉넉하다. 드라이파우더란 사모펀드가 투자자에게 받은 투자금 가운데 아직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자금을 말한다. 총포류가 발명된 시기 전쟁을 준비하며 마른 화약을 비축한 데서 유래한 용어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전 세계 사모펀드의 드라이파우더는 3조2901억달러(약 4283조원)에 달한다. 지난해(3조4118억달러)보다는 소폭 감소했지만, 10년 전(1조5710억달러)보다는 두 배 많다. 코로나19 이후 불확실성이 커진 데다 지난해까지 M&A 시장이 과열된 것이 일정 부분 영향을 줬다. 올해는 금리가 오르면서 적당한 매물을 찾기가 더 까다로워졌다. 사모펀드 ‘에이비즈파트너스’의 최현욱 대표는 “금리가 오르면 자본시장이 요구하는 수익률은 즉각 따라 오르지만, 부동산이나 기업 등 현물시장은 단시일에 이 같은 수익률을 반영하지는 않는다”며 “이 차이가 있는 동안은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사모펀드들은 총알을 장전한 채 적당한 사냥감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현재 사모펀드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대표적인 업종 가운데 하나가 ‘스팩(SPAC)’이라 불리는 기업인수목적회사다. 스팩은 증시에 상장되지 않은 기업을 인수·합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는데, 주식시장이 활황을 보일 때 인기가 치솟지만 약세장에서는 찬밥 신세가 된다. 존 아모로시 변호사는 “현재 스팩은 자본을 유치할 수 없는 사실상 ‘좌초(stranded)’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기 하락기에 빛보는 사모펀드
헐값에 나온 매물을 사들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 때문에 사모펀드는 상승장보다는 하락장에 더 힘을 내는 경향이 있다. 미국 대체 투자 플랫폼 아이캐피털이 2002~2017년 미국의 21개 주 연금의 투자 성과를 분석한 결과, 경기가 좋을 때는 공모펀드가 사모펀드보다 평균 2.9% 포인트 수익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닷컴 버블 직후인 2001~2003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2010년 등 경기가 나쁜 시기에는 사모펀드가 공모펀드보다 평균 4.4%포인트 높은 수익을 거뒀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의 분석도 비슷하다. 1980~2014년 ‘러셀 3000지수’(미국 기업 발행 주식 가운데 시가총액 기준 상위 3000개 회사)에 속한 기업 중 40%는 경기 침체기에 주가가 최고치 대비 70% 넘게 떨어졌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규모의 손실을 입은 사모펀드는 100개 중 3개꼴에 불과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락장에서는 사모펀드보다 주식이 13배나 더 위험하다는 게 JP모건의 설명이다. 스티븐 스워츠먼 블랙스톤 최고경영자(CEO)는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사모펀드가 하락장을 가장 잘 이용해 가장 매력적인 투자 상품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모펀드의 이같은 투자 전략은 사회적으로 거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시민단체 ‘금융개혁을 위한 미국인들’ 등이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대 들어 사모펀드는 80개 이상의 미국 소매업체를 인수했는데, 이후 인수 회사의 파산으로 13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2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사모펀드 산업을 ‘흡혈귀’에 비유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장난감업체 토이저러스다. 지난 2005년 토이저러스는 월마트 등 유통업체와 경쟁하다 경영이 악화돼 66억달러(약 7조원)에 베인캐피털 등 사모펀드 세 곳에 인수됐다. 그런데 이들 사모펀드는 인수자금을 마련하느라 쓴 매년 약 5억달러의 이자 비용을 토이저러스에 떠넘겼다. 이후 출생률 감소로 장난감을 찾는 사람이 줄어드는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토이저러스는 결국 2017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이로 인해 3만여 명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밖에도 미국 카지노업체 ‘시저스 엔터테인먼트’는 사모펀드가 인수하는 과정에서 230억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떠안았고, 아동의류업체 ‘짐보리’ 등 상당수 소매업체는 사모펀드가 인수한 후에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했다.
결국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올해 초 사모펀드가 기본적인 자료를 투자자에게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등의 규제안을 마련해 공개했다. 이 안에 따르면 사모펀드 매니저들이 분기마다 펀드 수익과 수수료, 비용, 매니저 보수 등을 투자자들에게 알려야 한다. 또 공익에 반하거나, 고객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도 사모펀드의 이른바 ‘롤업’(roll-ups) 전략 단속에 나서기로 했다. 롤업 전략이란 옷소매를 걷어올리듯 특정 기업을 인수한 다음 같은 업종의 다른 기업들을 계속 사들여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는 전략이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바이든 행정부가 사모펀드의 수수료 구조와 불투명성, 시장지배력, 임원 중복 등재 등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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