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망 차질과 전쟁 등으로 활활 타오르던 물가가 조금씩 꺾이는 기미가 보인다. 올 들어 최대 10%에 육박하던 미국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1월 7.1%(전년 동월 대비)로 낮아졌다. 우리나라 소비자물가도 7월에 정점(6.3%)을 찍은 뒤 지난달에는 5%로 상승폭이 꺾였다.
그런데 식료품 가격만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의 경우 지난달 식료품 물가는 10.6% 올라 전체 물가 상승률을 훨씬 상회한다. 세부 항목 가운데 달걀은 49.1% 치솟았고, 우유(27%)와 빵(15.7%) 등 상당수 품목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보였다. 우리나라도 6~10월 식료품 및 비주류음료 물가가 매달 6~8%씩 뛰어 전체 물가상승률을 2% 안팎 웃돌았다.
식료품의 원료가 되는 국제 식량 가격이 하반기 들어 확연한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집계하는 세계 식량지수는 지난 3월 159.7로 정점을 찍은 뒤 11월 135.7로 15% 낮아져 1년 전(135.3)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한때 금수조치까지 내려졌던 말레이시아산 팜유는 4월 말 톤당 7100링깃(약 205만원)까지 치솟았다가 현재는 3800링깃(약 110만원)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다. 시카고 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밀 가격도 5월 부셸(27.2㎏)당 1277센트 선에서 현재는 700센트대로 떨어졌다. 세계 식량 가격은 떨어지는데 왜 밥상 물가는 계속 오르는 걸까.
◇식량 가격 떨어져도 식료품 가격은 올라
이런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식량 가격이 밥상 물가에 반영되는 시차 때문이다. 식료품 기업들이 평소 몇 달치 원자재를 확보하고 있는 데다 가격 인상에 앞장서는 데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원자재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곧바로 가격을 올리지는 않는다. 농심·오뚜기·팔도 등 라면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가격을 올린 것도 3분기 들어서다.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인한 식량 가격 상승 여파가 하반기 들어 본격적으로 전 세계 식탁에 몰아닥친 셈이다.
식료품을 만드는 원재료인 밀가루나 옥수수, 팜유 등 외에 인건비와 이자 비용, 유가 등 부수적인 비용 상승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에서 일터를 떠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공장에서 일할 근로자는 물론 트럭 운전사나 철도 종사자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결국 이로 인한 인건비와 운송료 상승이 식료품 가격에 반영되는 것이다. 제임스 퀸시 코카콜라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제품 가격을 평균 12% 인상한 이유에 대해 “원재료 가격뿐만 아니라 직원 임금 상승 등의 부담을 메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하다. 농심은 1~3분기 운송보관료가 작년 1003억원에서 올해 1215억원으로 21% 늘었고, 롯데제과는 255억원에서 465억원으로 83% 증가했다. 이에 따라 식품업체들은 고환율로 인한 원자재·에너지 비용 상승분을 반영한다며 최근 들어 제품 값을 다시 올리고 있다. 오뚜기는 지난 10월 라면 관련 제품을 약 11% 인상했고, 빙그레는 ‘꽃게랑’ 등 6종의 과자 가격(편의점 기준)을 1500원에서 1700원으로 올렸다. 삼양식품도 ‘짱구’ 등 과자 3종의 가격을 15% 올렸고, 농심도 지난 9월 과자 브랜드 23개 제품의 출고가를 평균 5.7% 인상했다.
또 식료품 중 야채나 계란 같은 신선식품 가격은 전염병이나 날씨 등 작황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요즘 미국에서 계란값이 치솟은 것은 조류인플루엔자(AI) 유행으로 산란계가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올여름 이상고온과 장마 등으로 배추값이 두세 배 급등한 바 있다.
◇남몰래 웃는 음식료 회사들
그렇더라도 곡물 가격이나 인건비, 작황 등으로만 식료품 가격 급등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가령 밀값이 크게 오르면 라면값이 따라 오르지만, 이후 밀값이 떨어지더라도 이에 맞춰 라면값이 다시 내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식품업체의 가격 정책과 소비자의 수요 등이 식료품 가격 변동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한다. 식품기업들이 원재료 가격 인상을 구실 삼아 가격을 크게 올리다 보니 식료품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배선영 연세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가격을 올려도 수요에 거의 변화가 거의 없는 비탄력적 식품 기업이나 독과점 기업일수록 원재료 가격 상승을 구실로 가격을 올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식료품 기업은 원가 상승분 이상을 소비자에게 전가해 이익을 늘리고 있다. 코카콜라는 가격 인상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이 증가해 3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0% 증가한 110억500만달러(약 15조6800억원)를 기록했고, 순이익도 2.8% 증가했다. 미국 대형 축산물 가공 유통업체인 타이슨푸드 역시 올해 초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쇠고기 가격을 평균 24% 올린 덕분에 2분기에 월가의 예상치(128억달러)를 뛰어넘는 131억달러로 매출을 올렸다. 주당순이익(EPS)도 예상치(1.86달러)보다 높은 2.29달러를 기록했다. 미국의 멕시칸 음식 체인 치폴라도 올 들어 가격을 약 15% 올린 결과 지난 3분기 이익이 전년보다 26% 증가했다.
국내 식품회사 오뚜기도 올해 1~3분기 매출 원가가 1조7125억에서 1조9806억원으로 15.7% 늘었지만, 가격 인상 덕분에 매출도 2조467억원에서 2조3533억원으로 15% 늘었고 영업이익도 1394억원에서 1510억원으로 8.3% 증가했다. 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는 “식품 회사들이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해 결과적으로 뜻밖의 횡재를 올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식료품 기업들의 행태에 대해 “가격 전가력을 무기 삼아 폭리를 취한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나온다. 팀 랭 런던대 식품정책 명예교수는 가디언에 “지난 1년간 소비자들이 식품 구매에 쓴 약 2500억파운드(약 386조원) 가운데 식품 생산자(농부·축산업자 등)가 가져간 수익은 고작 8%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상원의원은 타이슨푸드를 겨냥해 “시장 지배력을 남용하고 가격을 인상해 기록적인 이익을 얻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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