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은 작년 말 임직원 소통 행사에서 새해 목표 가운데 하나로 ‘회의 시간 줄이기’를 언급했다. 경 사장은 “회의 시간을 25% 줄이고 나머지 75% 가운데 절반 정도는 비대면으로 바꿔 오가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평소 직원들과의 소통 과정에서 대면 회의나 보고에 대한 불만을 듣고 이를 개선하겠다는 의도로 말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의는 직장인의 필수 업무 가운데 하나지만 ‘불필요한 시간 낭비’로 여기는 일이 적지 않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 등에서는 “회의 왜 하는지 모르겠다” “그 시간에 다른 업무 하면 생산성이 훨씬 높아질 것” 같은 불만 글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왜 회의에 대한 불만은 끊이지 않는 걸까. 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국내외 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불만 1위는 “결론 없는 회의”
WEEKLY BIZ가 직장인 대표 플랫폼 리멤버와 함께 직장인 총 614명에게 ‘직장 내 회의 문화’에 대해 물었다. 설문은 타깃 조사가 가능한 리멤버 리서치 서비스를 통해 사원·대리급, 과장·차장급, 부장·임원급 등 직급별로 200여명씩 나눠 진행했다. 설문 결과 응답자의 69%가 불만족스러운 회의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회의 문화에 불만이 가장 많은 직급은 과장·차장급이었다. 이 직급 응답자의 75%가 불만족스러운 회의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해 사원·대리급(60%), 부장·임원급(72%)보다 많았다. 대기업 차장급 직원 홍모씨는 “중간에 끼인 연차라 회의에서 의견을 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하고,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실무도 주도해야 하다 보니 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회의가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불만 사항을 물었더니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나서’라는 답변(27%)이 가장 많았다. 기껏 참석자를 모아 회의를 해놓고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는 회의에 회의감이 든다는 것이다. 마케팅 회사 8년 차 직원 이모씨는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며 결국 결론도 못 정하고 끝나는 회의가 많아 시간 낭비라고 느껴진다”고 했다. 공기업 11년 차 직원 최모씨는 “회의를 아무리 해도 결국 윗선 의견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 ‘보여주기식 회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상급자 위주의 수직적인 회의라서(24%)’ ‘인원 구성이나 진행이 비효율적이라서(17%)’ ‘회의 목적이 불분명해서(17%)’ ‘단순 정보 공유용 회의라서(14%)’ 등의 순으로 답변이 많았다. 수직적인 회의에 대한 불만 비율은 부장·임원 직급에서도 평균과 비슷했다. 한 건설사 임원은 “세부 내용을 잘 아는 실무진 의견을 듣고 싶은데 이를 숙제 검사처럼 여기는 직원이 많다”며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잘 안되니 결국 내가 발언을 많이 하게 되고 이럴거면 회의를 왜 하나 싶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회의 시간과 바라는 회의 시간 사이의 간격도 컸다. 응답자의 61%가 이상적인 회의 시간으로 ‘30분 이내’를 꼽았지만, 실제 30분 이내 회의를 하는 경우는 28%에 불과했다. 절반 이상이 평균 30분~1시간 회의를 한다고 답했고, 1시간을 넘는다는 답변도 19%나 됐다. 중견 교육업체 과장급 직원 이모씨는 “쓸데없는 사담 때문에 회의가 산으로 가거나, 다들 책임지기 싫어 말을 돌리면서 한없이 늘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체크리스트 만들고, 모래시계도 동원
일부 기업은 회의 문화 개선에 나서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조직 문화 유연성이 큰 스타트업이나 IT 기업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카카오스타일은 직원 설문 조사에서 ‘회의가 많다’는 의견이 다수 나오자 작년 10월 이를 바꾸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정보 공유가 목적인 회의는 서면으로 대체하게 했고, 일부 회의실에는 회의 시간 체크를 위해 모래시계를 배치했다. 결론 없는 회의나 습관적 회의를 주의하자는 내용의 포스터도 만들어 사무실 곳곳에 붙였다.
마켓컬리 운영사 컬리도 지난해 사무실을 옮기며 회의실 모니터마다 ‘회의 체크리스트’를 띄우기 시작했다. ‘회의 안건과 의사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미리 공유했는지’ ‘끝내기 전 다음 스텝과 담당자를 정했는지’ 등 6가지 질문이 적혀 있다. 롯데쇼핑 이커머스 사업부는 작년 나영호 대표가 “회의 방법을 바꿔보자”고 제안하면서 회의 목적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이를 회의 전 미리 공지하게 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토론하는 회의인지, 진행 과정을 확인하는 회의인지 등을 구분해 시간 낭비를 줄여보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이 밖에 가구업체 한샘은 작년부터 매월 1일에 하던 월례 조회를 대표 명의의 이메일 발송으로 바꾸는 등 대면 회의·보고 횟수를 줄였고, LG전자는 조직 문화 혁신의 일환으로 일부 조직에서 회의 때 호칭을 생락하고 영어 이름이나 별명을 부르도록 하고 있다.
‘회의다운 회의’ 저자인 홍국주 플랜비디자인 컨설턴트는 “회의 문화를 바꾸려면 특정 직급이나 그룹만이 아니라 모든 직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누구 하나가 잘한다고 회의가 잘되는 게 아니라 모두가 회의를 이끄는 방법,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불필요한 회의로 美서 1억달러 낭비
회의에 대한 불만이 많기는 해외도 마찬가지다. 작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의 스티븐 로겔버그 교수가 미국 직장인 6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이 회의에 쓰는 시간은 주당 18시간에 달했지만 이 가운데 3분의 1가량은 꼭 필요하지 않은 회의라고 여겼다. 로겔버그 교수팀은 이런 식으로 불필요한 회의 참석에 낭비되는 비용이 5000명 이상 대기업 기준 연간 1억100만달러(약 1300억원)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극약 처방도 나온다. 직원 1만명을 둔 캐나다 전자 상거래 기업 쇼피파이는 최근 “3명 이상이 참여하는 모든 정기 회의를 스케줄 표에서 삭제하고, 이를 다시 일정에 추가하기 전에 2주 간의 냉각 기간을 갖겠다”고 선언했다. 습관적으로 소집해온 회의를 없애고 해당 회의가 정말 필요했는지 고민해 보자는 취지다. 회사 측은 이번 조치로 거의 1만 개의 회의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카즈 네자티안 부사장은 “회의하려고 쇼피파이에 입사한 직원은 아무도 없다며 “방해받지 않는 업무 시간은 가장 소중한 자원”이라고 했다.
미국 업무 관리 소프트웨어 기업 아사나도 작년 봄 ‘회의의 종말’이라는 이름의 비슷한 실험을 진행했다. 직원들은 일단 모든 회의를 삭제하고 48시간 동안 심사숙고한 후 가치 있다고 판단한 회의만 다시 추가했다. 아사나는 이 실험을 통해 1인당 연간 3주 넘는 시간을 절약했다고 설명했다.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 영국 생활용품 제조업체 크로락스, 업무용 소프트웨어 업체 슬랙 등은 업무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회의 없는 날’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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