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농업을 적용한 땅속에 지렁이가 꿈틀대고 있다. 경작지에 대한 물리·화학적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다양한 동·식물을 함께 키우는 재생 농업에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미국 농무부 자연자원보존국

미국 아웃도어 기업 파타고니아는 2016년부터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회사를 통째로 기부할 정도로 환경 보호에 관심이 많은 이 회사가 주류 사업에 뛰어든 것은 맥주의 원료인 밀 때문이다. 밀은 한해살이 작물이라 수확 후 씨를 뿌리기 전에 매년 밭을 가는데, 이 과정에서 흙 속에 담긴 이산화탄소가 다량 방출된다.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자 파타고니아는 ‘컨자(kernza)’라는 다년생 밀 품종으로 맥주를 만든다. 한 번 심으면 5년 연속 곡물을 수확할 수 있고,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산업형 농업이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생 농업(regenerative agriculture)에 뛰어드는 기업이 늘고 있다. 재생 농업은 밭을 갈아엎는 경운(耕耘) 작업을 최소화하면서 살충제·농약·합성비료 사용을 피하고, 다양한 지피(地被) 작물을 키워 척박해진 토양을 회복시키고 탄소 배출을 줄이는 농법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CB인사이트는 올해 주목해야 할 기술 트렌드로 가정용 로봇, 가상 발전소 등과 함께 재생 농업을 꼽았다.

◇재생 농업에 뛰어드는 기업들

미국의 곡창 지대인 아이오와주 프레리 시티에서 1000에이커(약 400만㎡) 규모의 옥수수 밭을 경작하는 농부 윌 캐넌씨는 수확이 끝난 밭에 호밀이나 무 같은 지피 작물을 파종한다. 지피 작물을 심으면 토양 침식을 막고 땅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등 여러 장점이 있지만, 파종하려면 씨앗과 기계 사용료, 인건비 등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식품 회사 펩시코는 캐넌씨가 생산한 옥수수를 비싸게 수매하는 방식으로 이 비용을 댄다. 이런 식으로 펩시코는 2030년까지 700만에이커를 재생 농업으로 경작해 온실가스를 최소 300만톤 감축할 계획이다.

세계 최대 식품 기업 네슬레 역시 2025년까지 12억 스위스프랑(약 1조6130억원)을 투자해 공급망 전반에서 재생 농업 비율을 높이고 있다. 2030년에는 주요 성분의 50%를 재생 농업 작물로 사용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세계 최대 유통 기업 월마트도 2030년까지 우리나라 면적의 2배나 되는 땅 5000만에이커(약 20만2343㎢)를 재생 농업에 활용하기 위해 보호·관리·복원 작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일찌감치 재생 농업에 발을 내디딘 파타고니아는 2030년까지 재생 농업으로 생산한 면화만을 사용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 밖에 글로벌 소비재 기업 유니레버는 지난해 초 보험사 악사와 제휴해 재생 농업에 투자하기 위한 10억유로(약 1조3400억원) 규모의 사모펀드를 조성했고, 세계 최대 농산물 회사 카길은 농부들이 재생 농업으로 탄소 배출을 줄여 획득한 탄소 크레디트를 통해 수익을 올릴 플랫폼을 출시했다.

이처럼 굴지의 기업들이 재생 농업에 뛰어들면서 시장 규모는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시장조사 기관 마켓앤드마켓에 따르면 재생 농업 시장 규모는 지난해 87억달러(약 10조6400억원)에서 2027년 168억달러(약 20조5400억원)로 5년 새 2배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아웃도어 기업 파타고니아가 다년생 밀 품종 ‘컨자’로 만들어 출시한 맥주. /파타고니아

재생 농업의 생산성과 작업 효율을 높이는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도 늘고 있다. 2020년 설립된 영국의 베르나는 지리 공간 데이터를 분석해 재생 농업에 최적화된 토지를 식별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해 영국 정부에서 100만달러(약 12억3000만원)를 투자받았다.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애그리컬처는 무(無)경운 농법을 위한 롤러 압착기 등 재생 농업에 필요한 각종 농기구를 개발 중이다. 미국 트위스티드 필드는 태양광판이 부착된 자율주행 로봇으로 정밀 파종, 제초 작업, 수확 등을 자동화했다. 지난해 600만달러(약 73억원)의 시드 펀딩을 받은 클림은 재생 농업을 시도하려는 농부들에게 금융과 교육 지원 프로그램을 연결해주고 있다.

기업들이 재생 농업에 주목하는 것은 종전 산업형 농업이 환경에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유엔에 따르면 농업으로 대기에 뿜어지는 탄소량은 전체 배출량의 3분의 1에 달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산업형 농업이 전 세계 담수의 약 70%를 소모하고, 생물 다양성을 해치는 데 60%나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WEF에 따르면 산업형 농업으로 현재 전 세계 농경지의 절반 이상이 황폐화된 상태다. 재생 농업 단체 ‘리제너레이션 인터내셔널(RI)’은 “현 추세라면 50년 안에 전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토양이 충분히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개념 모호” 비판도

재생 농업 지지자들은 재생 농업이 환경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농가 수익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재생 농업의 선구자이자 미국 농업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으로 선정된 농부 게이브 브라운은 “일반 농장에서 많은 시간과 인부를 투입해야 하는 일의 대부분을 우리는 자연에 맡기기 때문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며 “비료나 살충제, 농약 등을 뿌리지 않아도 되고, 가축에게 먹일 사료를 운반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미국 노스다코타주 비스마르크 부근에서 2만㎡(약 6050평)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는 그는 옥수수, 콩, 봄밀, 귀리, 보리, 호밀, 헤어리베치 등 다양한 재래 작물을 재배하고, 같은 경작지 안에서 소, 양, 돼지, 암탉도 방목한다.

하지만 재생 농업으로 전환하려면 인프라와 농기계, 토질 개량 등에 상당한 초기 비용이 든다. 농약과 비료 사용을 줄이면 당장 생산량이 줄어들 우려도 있다. 이 때문에 대규모 농장까지 재생 농업을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회의론도 나온다. 재생 농업의 정의부터 모호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가령 화학 비료와 농약 사용, 탄소 배출을 얼마나 줄여야 재생 농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뚜렷한 기준이 없다. 이 때문에 재생 농업이 글로벌 기업의 그린 워싱(친환경 위장)에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리카르도 살바도르 미시간주립대 교수는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재생 농업이라는 용어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제로 탄소 배출을 얼마나 줄이는지 입증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며 “재생 농업의 유용성을 입증하는 일과 더불어 한때의 유행에 그치지 않고 정착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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