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종목을 공매도한 뒤 해당 기업에 대한 부정적 보고서를 내 수익을 챙기는 미국 행동주의 펀드 힌덴버그 리서치가 최근 인도의 한 재벌 그룹을 무차별 저격하고 있다. 타타·릴라이언스와 함께 인도 3대 재벌로 꼽히는 아다니 그룹이다.
지난해 세계 3위이자 아시아 최고 부호에 등극한 가우탐 아다니가 1988년 세운 아다니 그룹은 인도의 에너지, 물류, 광업, 가스 등 국가 핵심 인프라 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기업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시가총액이 2800억달러(약 352조원)에 이르러 인도 최대 기업 타타그룹을 넘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힌덴버그가 “아다니 그룹은 막대한 부채를 끌어와 주가 조작, 분식 회계를 저지르며 기업 역사상 가장 큰 사기를 치고 있다”고 폭로한 뒤 계열사 주가가 일제히 폭락하는 등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 美행동주의 펀드 힌덴버그에 덜미 잡힌 아다니
지난 2020년 미국 수소전기차 업체 니콜라의 충격적 사기 행각을 폭로해 명성을 떨친 힌덴버그는 지난달 24일 아다니 그룹을 저격하는 100쪽 분량 보고서를 냈다. 인도 증시에 상장된 아다니 그룹의 주요 계열사 7곳의 주가가 지난 5년간 30~50배가량 폭등한 과정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으며, 아다니 그룹이 정치 권력과의 결탁 등을 통해 주가를 조작하고, 분식 회계 및 자금 세탁을 저질렀다는 내용이다.
힌덴버그에 따르면 아다니 그룹은 계열사로부터 돈을 빼돌리기 위해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수입·수출 관련 문서를 위조하거나 매출을 조작했다. 아다니 주요 계열사에 대한 감사를 총괄하는 곳은 직원 수 11명에 홈페이지도 없는 작은 회계법인이다. 힌덴버그는 지난 2년간 전(前) 아다니 그룹 고위 임원을 포함해 관계자 수십명을 만나고, 수천건의 문서를 검토해 증거들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힌덴버그는 “아다니 그룹은 회사에 비판적인 언론과 기관들을 소송으로 겁박하며 비위를 은폐하고 있다”며 아다니 측에 88가지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힌덴버그의 선전포고에 주식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보고서 공개 후 3거래일 만에 아다니 그룹의 시가총액 중 680억달러(약 86조원)가 증발했다. 아다니 그룹은 힌덴버그를 “공매도 차익을 노리는 사기 집단”이라고 비난하며, 폭로 이후 나흘 만에 413쪽짜리 반박 자료를 내는 등 역공을 펼쳤으나 시장 반응은 싸늘하다. 힌덴버그는 “공시된 자료를 토대로 분석해도 아다니 상장사들의 주가에 85%가량 거품이 껴 있다”고 주장했는데, 보고서 공개 이후 상장사들의 주가는 3주 만에 50~60% 폭락했다.
◇“모디와 아다니는 공생 관계”
사실 아다니 그룹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이가 많았다. 아다니 회장과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각별한 관계 때문이다. 아다니 회장과 모디 총리는 모두 구자라트주(州) 출신으로 모디 총리가 2000년대 초 구자라트주 주지사였던 시절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유명하다. 모디 총리는 선거 유세 기간 아다니 회장의 전용기를 타며 친분을 드러냈고, 아다니 회장과 해외 순방에 동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모디 총리가 아다니 그룹에 특혜를 줬다는 보도도 여러번 나왔다. 심지어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 주변국의 대규모 에너지 관련 사업권을 아다니 그룹이 따낼 수 있도록 인도 정부가 해당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아다니 그룹은 과거 170억달러 규모의 자금 세탁, 부패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았으나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정권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논란은 더욱 커졌다. 이런 논란과 의혹 속에서 아다니 회장의 재산은 2014년 모디 총리 집권 후 8년 만에 20배 넘게 급증해 지난해 9월 기준 1500억달러(약 190조원)에 달했다.
인도의 부와 불평등을 다룬 책 ‘억만장자 라지’를 쓴 영국의 정책 분석가 제임스 크랩트리는 “모디 총리와 아다니 회장은 공생 관계”라며 “아다니 회장의 여러 대형 프로젝트는 인프라 투자를 통한 외자 유치 및 수출 성장을 외치는 모디 총리의 구자라트식 개발 모델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힌덴버그가 지적한 부채 문제 역시 아다니 그룹을 비판할 때 단골로 등장해온 소재다. 막대한 자본 투입이 필요한 인프라 사업의 특성상 아다니 그룹은 부채를 통해 기업 규모를 키워왔는데 지난해 기준 순부채가 1조9744억루피(약 30조원)에 달한다. 지난해에만 부채가 37% 늘었다. 자금 조달 방법도 정상적인 루트가 아니라 계열사 간 상호 출자에 의존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해 8월 보고서에서 “아다니 그룹이 부채의 덫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정적 한 방은 부족
이번 사태는 투명성과 정당성이 결여된 인도식 경제성장 모델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싱가포르 자산운용사 글로벌 CIO 오피스의 게리 두건 대표는 “해외 투자자들은 인도의 기업 지배구조, 기업 투명성, 족벌주의, 부채 수준 등을 재평가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다니 그룹이 당장의 주가 폭락을 딛고 재기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인도 정부가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주고 있고, 인프라 부분에서의 독점적 지위로 막대한 수익을 꾸준히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에 기반해 이번 사태를 외세의 침공으로 간주하는 인도 내 여론도 아다니 그룹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아디니 그룹도 지난해 반(反)정부 성향의 유력 방송사 ‘뉴델리 텔레비전(NDTV)’을 적대적으로 인수·합병(M&A)하는 등 여론 관리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일각에서는 “힌덴버그 보고서에 결정적 한 방이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보고서에 담긴 내용 대부분이 자금 세탁, 부채 문제 등 이미 제기된 의혹을 정리한 수준이고, 내부 문건 같은 구체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고서를 낸 시점이 미심쩍다는 반응도 있다. 서울대 남아시아센터장 강성용 교수는 “힌덴버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잘 포장해서 대규모 유상증자 직전이라는 기막힌 타이밍에 터뜨렸다”며 “힌덴버그는 공매도로 돈을 버는 회사이기에 유증 좌절로 주가가 폭락하는 것을 노렸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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