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직장 관뒀어/새로운 활력소를 찾겠어/일은 너무나 끔찍했어/9시에 시작해 5시 넘어야 끝나/일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밤에 잠도 못 잤어”
미국의 유명 팝가수 비욘세가 지난해 6월 발표한 신곡 ‘브레이크 마이 소울(Break My Soul)’ 가사 일부다. ‘번아웃(burn out)’에 빠진 직장인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가사로 화제를 모았다. 업무로 인한 정서적 탈진을 의미하는 번아웃은 노래 가사로 등장할 만큼 팬데믹 이후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됐다.
과거에는 번아웃에 빠진 사람을 ‘조직 부적응자’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를 중심으로 직장인이 한번쯤 거쳐야 할 통과 의례처럼 여겨질 정도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MZ세대 직장인의 45%가 번아웃에 빠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21년 인크루트 조사에서는 국내 직장인의 64.1%가 번아웃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번아웃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로 연간 3220억달러(약 420조원)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번아웃에 따른 퇴사와 이직이 빈번해지고, 일에서 열정을 뺀 소극적 업무관을 뜻하는 콰이어트 퀴팅(Quiet Quitting) 풍조까지 확산하고 있지만 기업들은 뾰족한 수를 마련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번아웃 요인이 워낙 다양해 대처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요인 중에서도 번아웃과의 연관성이 특히 높은 것들이 있고, 해당 요인을 개선할 수 있다면 번아웃 발생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 WEEKLY BIZ가 디지털 멘털 케어 스타트업 ‘포티파이(40FY)’와 함께 직장인 1000명을 심층조사해 어떤 사람들이 번아웃에 쉽게 빠지는지, 어떻게 하면 번아웃 가능성을 낮출 수 있는지 분석했다. 포티파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맥킨지 컨설턴트 출신 문우리 대표가 설립한 회사로, 올해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에서 ‘마인들링’ 앱으로 혁신상을 받았다.
◇직장인 절반 번아웃 상태
5년 차 대기업 직장인 이모(33)씨는 지난달 항우울제를 처방받았다. 연봉과 복지 모두 업계 최상위권에 속하는 회사에 다니지만 성과 압박을 받으며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니 퇴근 후 멍하게 집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기분 전환을 위해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운동을 시작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일을 손에서 놓고 싶다는 우울과 무력감만 커졌다. 이씨는 “성과는 좋은 편이었으나 경쟁을 부추기는 문화에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라며 “팀장의 불합리한 의사 결정도 일에 대한 애정을 식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국내 직장인 상당수가 우울과 불안, 번아웃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직장인 1000여명에게 130여 문항에 걸쳐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절반(49%)이 우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우울증 심각군에 속하는 직장인도 12.4%에 달했다. 이번 조사는 전국의 대기업·중소기업·스타트업 직장인을 대상으로 이뤄졌으며 스타트업 비율이 23.1%, 평균 연령 36.1세, 남녀 비율은 34대66이었다.
설문에 따르면 불안을 겪는 직장인도 10명 중 4명(40%)이나 됐고, 번아웃 진단을 받은 직장인은 절반이 넘었다(55.1%). 우울·불안이 삶이나 일상 전반에 대한 의욕 저하와 싫증 등을 의미한다면 번아웃은 직장 내 업무나 역할 등에 한정된 심리적 탈진 상태를 의미한다. 우울, 불안, 번아웃 모두 삶의 만족도를 크게 떨어뜨리고 업무에 큰 지장을 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측면이 많다. 우울과 불안은 결국 번아웃으로 이어진다. 우울·불안이 ‘심각’ 수준인 직장인은 ‘양호’ 수준인 직장인에 비해 번아웃에 걸릴 확률이 각각 83%, 69%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 직장인 중 23.7%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을 만큼 밤잠을 설치는 직장인도 많다. 불면증 역시 번아웃 가능성을 높이는 주요인이다. 불면증 ‘심각군’으로 분류된 직장인은 ‘양호군’에 비해 번아웃 확률이 26% 높았다. 불면증 심각군 10명 중 7명은 “지난 6개월간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는 문항에도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저소득 30대 여성이 가장 취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번아웃에 쉽게 빠질까. 급여 수준과 직급, 성별이 번아웃 발생 확률과 특히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체로 소득이 적을수록, 직급이 낮을수록 번아웃 발생 가능성이 확연히 높았다. 또 남성보다는 여성이, 스타트업보다는 비(非)스타트업 직장인이 번아웃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소득을 보면, 연간 3000만원 미만 저소득 그룹은 번아웃 심각군에 속한 비율이 70.8%에 달해 8000만원 이상인 고소득 그룹(13.8%)의 5.1배나 됐다. 직급이 번아웃에 끼치는 영향도 컸다. 관리자급은 번아웃 심각군으로 진단된 비율이 11.8%에 불과한 반면 중간 관리자와 팀원 급에선 각각 46%, 58.9%에 달했다.
또한 여성은 61.8%가 번아웃 심각군으로 분류돼 남성(28.1%)보다 2.2배나 많았다. 직장 형태로 나누면 비스타트업 직장인(56.1%)이 스타트업 직장인(31.8%)보다 번아웃에 취약한 것으로 조사됐다. 연령대 중에서는 30대의 번아웃 위험이 가장 컸고, 20대와 40대는 비슷했으며 50대 이상에서는 크게 낮았다. 조직 규모는 번아웃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즉 통계적으로 봤을 때 ‘스타트업이 아닌 직장에 다니는 소득이 적고 직급이 낮은 30대 여성’이 번아웃에 빠질 확률이 가장 높은 셈이다. 김나이 커리어 액셀러레이터는 “30대 여성은 업무 압박 속에 결혼이나 출산, 육아까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여서 번아웃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고소득자는 업무 부담이 커도 상당한 경제적 보상을 통해 스트레스를 완화할 수 있다는 점이 번아웃 확률을 낮추는 데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번아웃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잦은 야근과 휴일 근무 등 과도한 업무가 번아웃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업무량(양적 직무 부하)보다 ‘질적 직무 부하’가 번아웃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질적 직무 부하는 업무 지시가 명확하지 않거나 혼란스럽고, 책임과 역할이 불분명할 때, 원하지 않는 업무를 해야 하는 경우 높아진다. 번아웃 취약군 가운데 번아웃 상태가 양호한 집단은 심각한 집단에 비해 질적 직무 부하가 평균 24.3% 낮았다. 직장인 전체를 놓고 보면 질적 직무 부하가 12% 올라갈 경우 번아웃 확률이 50% 늘고, 18% 올라가면 이직 의사가 53%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리더십·자율성·존중’이 키포인트
그러나 번아웃 취약군에 속한다고 해서 반드시 번아웃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번아웃에 취약한 환경에 놓여 있는데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번아웃에 빠지는 사람들과 뭐가 다른 걸까. 데이터를 분석해 나온 키워드는 ‘리더십·자율성·존중’이었다.
번아웃 취약군인 저소득(연봉 4000만원 이하)·낮은 직급(팀원)·여성 각 그룹에 속하면서도 번아웃 양호군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이 영역의 여건이 눈에 띄게 좋았다. 즉 ‘리더십·자율성·존중’ 영역을 개선하면 조직 전체의 번아웃 위험성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뜻이다. 리더십은 팀장·부장이 얼마나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팀원들에게 동기 부여를 잘 해주는지를 의미한다. 자율성은 유연 근무나 연차 사용, 업무 조절 등을 얼마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지, 존중은 얼마나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지를 뜻한다. 취약 그룹에 속해 있는데도 번아웃에 면역력이 강한 사람들은 리더십·자율성·존중 영역의 평균 점수가 각각 53.7%, 37%, 36% 더 높게 나왔다.
번아웃 취약 그룹 내에서 상태가 양호한 이들은 직장 내 유해 환경에 노출되는 빈도도 27% 낮았다. 유해 환경이란 조직 내에서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언행, 성추행·성희롱 등이 발생하는 상황을 말한다. 문우리 포티파이 대표는 “직원들의 번아웃이나 이직으로 고민하는 기업은 급여나 복지 등 경제적 보상을 높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그보다는 회사 내 리더십이나 자율성 저해 요인을 찾아 개선하는 것이 더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월급 인상보다 원인 진단이 우선
번아웃은 개인에게도 고통이지만, 기업에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번아웃이 심화할수록 이직 가능성이 높아지고, 업무 생산성이 크게 떨어진다. 수년간 교육하고 훈련시킨 직원들이 무더기로 회사를 떠나 새로운 직원들을 채용해야 한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다시 업무 관련 교육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비용이 발생한다. 설문 결과에 따르면 심각한 번아웃을 느끼는 직장인들은 “지난 6개월간 이직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는 문항에 54.9%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번아웃을 겪지 않은 직장인 답변율(13%)의 4배가 넘는다.
번아웃에 빠진 직원들은 회사를 떠나지 않아도 기업 생산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거나 정신적 탈진으로 병가를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업체 ‘갤럽’에 따르면 번아웃을 겪은 사람이 병가를 낼 확률은 번아웃을 겪지 않은 사람과 비교해 63%나 높다. 번아웃과 그에 따른 무력감이 주변 직원들에게까지 전염되면서 회사 전체에 업무 기피 현상이 심화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딜로이트는 번아웃으로 인해 2021년 영국에서만 240억~280억파운드(약 37조~43조원)의 생산성 손실이 일어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편견이나 추측에 근거해 섣불리 번아웃에 대처할 것이 아니라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조직의 번아웃 상태를 면밀히 진단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내 리더십이나 자율성, 존중 등의 영역에 빨간불이 켜져 있는데 근무 시간을 줄이고 급여를 조금 올려준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요 글로벌 기업들은 맞춤형 진단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구글은 반기마다 리더 상향 평가를 실시해 리더십 문제를 점검하고, 시스코와 아디다스는 주·월간 단위로 직원들에게 설문을 진행해 수시로 업무 만족도를 파악한다.
번아웃을 막기 위해 리더십과 직장 내 소통을 강화하는 데도 아낌없이 투자한다. 소프트웨어 업체 어도비는 실시간 소통과 대화를 통해 성과를 점검하는 ‘체크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체크인 제도는 매분기 초 개별 목표를 설정한 뒤 상사와 동료, 협업 부서로부터 지속적 피드백을 받으면서 분기 말 3개월간의 성과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는 방식이다. 체크인 제도 도입 후 어도비의 퇴사율은 30% 낮아졌다. 구글과 IBM은 정신 건강 관련 교육 및 훈련을 받은 직원들을 배치해 어려움에 처한 동료와의 소통 기회를 늘리고 있다.
직원수 100여 명 규모의 국내 IT 업체 A사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이 회사는 최근 1~2년 새 저연차 직원들의 퇴사율이 높아지자 유연근무 도입과 함께 연봉을 올리고 복지 제도를 보완했으나 이탈을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전 직원 대상 심층 설문을 진행한 결과, 업무 효능감이 크게 낮아진 상태라는 것을 발견했다. 업무 효능감이 낮으면 일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지고, 스스로 조직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번아웃 상태 분석 이후 A사는 직무 재배치를 비롯해 저연차 직원들과 리더들의 면담 시간을 늘리고, 경영진과의 온라인 소통 채널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 긍정적 반응을 얻고 있다.
번아웃을 막으려면 개인의 대응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개인의 회복 탄력성이나 적응력을 높여 업무 만족도를 끌어올리고, 스트레스가 번아웃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회복탄력성은 어려움이 생기거나 곤경에 빠졌을 때, 그에 적응하거나 극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구글·아마존·메타 등 미국 빅테크들을 비롯해 SK하이닉스·LG화학·한화시스템 등의 국내 주요 기업들이 사내 심리 상담 및 정신 건강 지원 서비스를 강화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LG경영연구원 곽연선 연구위원은 “번아웃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리더와 조직 차원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조직 문화 개선과 더불어 직원 개개인에 대한 맞춤형 정신 건강 관리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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