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전설적인 투자자이자 ‘가치 투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은 1926년 철도에 관한 정보를 찾다 우연히 송유관 업체인 ‘노던 파이프라인’이 시가총액보다 많은 철도 회사 채권과 미국 국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던 파이프라인은 1911년 시행된 반독점법으로 스탠더드 오일(엑손모빌의 전신)에서 쪼개진 회사 34곳 중 하나다. 당시 노던 파이프라인이 보유한 채권과 국채 가치는 주당 95달러였는데, 그레이엄은 회사가 이 채권들을 팔아 주당 90달러씩 주주들에게 나눠주더라도 회사를 꾸려나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노던 파이프라인의 전체 주식 가운데 5%를 사들인 뒤 회사 경영진에게 배당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송유관 사업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게 뭐냐”며 거부했다. 주주총회에 참석한 그레이엄에게 발언권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레이엄은 노던 파이프라인 주식을 100주 이상 보유한 주주를 모두 만나 주식을 사들였다. 결국 2년 뒤 열린 주주총회에서 위임장 대결을 벌여 이사회 5석 중 2석을 차지했다. 주총 결과에 놀란 경영진은 그레이엄이 요구한 대로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했다. 이 사건은 주주가 기업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이익을 추구하는 ‘주주 행동주의’의 최초 사례로 평가된다.
약 100년이 지난 현재, 주주 행동주의는 전 세계 자본시장에서 무시 못 할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 그레이엄처럼 기업의 지분을 확보해 단순히 배당금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이사진을 교체하는 등 경영에 적극 개입하고, 회사의 지배 구조까지 손을 대고 있다. 주주 행동주의를 주요 투자 전략으로 삼는 전문 펀드도 여럿 생겼다. 최근 SM엔터테인먼트의 지분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갈등도 국내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주주 행동주의를 보는 눈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모든 회사가 잘 관리된다면 (주주) 행동주의가 필요 없다”며 옹호했다. 반면 기업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익만 챙겨 나가는 하이에나로 보는 시각도 많다. 행동주의는 주주 이익을 대변하는 정의의 사도일까, 아니면 멀쩡한 기업을 망치는 약탈자일까. 행동주의 펀드가 손댄 기업의 소액주주들은 정말 이득을 볼 수 있을까.
◇약세장 때 활개치는 행동주의 펀드
주주 행동주의는 1980년대 들어 이른바 ‘기업사냥꾼’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기업사냥꾼은 특정 목적을 위해 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하는 투자자나 전문가 집단을 의미한다. 2005년 KT&G 지분을 인수해 2대 주주에 오른 뒤 배당 확대, 부동산 매각 등을 요구했던 칼 아이컨이 대표적이다.
아이컨은 1985년 필립스 퍼트롤리엄이라는 석유 회사 주식을 사들인 뒤, 더 비싸게 사들이지 않을 경우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결국 회사는 요구를 받아들였고, 아이컨은 5250만달러의 수익을 거두고 떠났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자 오언 워커는 저서 ‘이사회로 들어간 투자자’에서 “칼 아이컨의 이런 행태로 인해 주주 행동주의는 ‘그린메일(경영권이 취약한 대주주에게 보유 주식을 높은 가격에 팔아 프리미엄을 챙기는 것)’이라고 불리게 됐고, 이기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후 빌 애크먼(퍼싱 스퀘어), 대니얼 러브(서드 포인트), 넬슨 펠츠(트라이언), 폴 싱어(엘리엇) 같은 억만장자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등장해 세계 금융시장에서 점점 더 목소리를 높여갔다.
국내에도 2000년대 이른바 ‘장하성 펀드’로 알려진 ‘라자드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를 필두로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펀드가 여럿 생겼다. ‘강성부 펀드’로 알려진 KGCI, 플랫폼파트너스, 얼라인파트너스 등이 대표적인 토종 행동주의 펀드로 꼽힌다.
1920년대 시작된 주주 행동주의가 비교적 근래 들어 본격화된 건 지분 구조와 관련이 있다. 기업 설립 초기에는 상장 기업의 지분이 대개 설립자, 설립자 가족, 일부 투자자 등 극소수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행동주의 펀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다. 1900~1949년 외부 펀드가 적대적으로 경영에 개입한 사례는 7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업이 나이가 들어 상속이나 증자, 주식 매도 등으로 최대 주주 지분이 희석되면 행동주의 펀드가 활개치기 좋은 여건이 마련된다.
특히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건 주가가 하락할 때다. KB증권 최효정 연구원은 “증시가 좋을 때는 주요 기업의 수익률이 대체로 높기 때문에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활동이 뜸하지만, 경기가 얼어붙고 투자 환경이 나빠지면 주주 행동을 통해서라도 주가를 띄우겠다며 나서는 움직임이 증가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 세계 주주 행동주의 활동은 주가가 급락한 지난해 이후 크게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라자드에 따르면, 전 세계 행동주의 캠페인은 2018년 이후 해마다 감소해 2021년 173건까지 떨어졌다가 지난해에는 235건으로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미국에서 행동주의 표적이 된 기업 수도 2021년 462개에서 지난해 511개로 늘었다.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펀드가 손댄 기업은 2019년 9개에 불과했으나 작년에는 47개로 증가했다.
◇단기 주가는 상승, 장기 주가는 글쎄
행동주의 투자자의 손이 닿은 기업은 단기간 주가가 오르는 경우가 많다. 가령 결제 플랫폼 업체 페이팔은 2021년 300달러이던 주가가 2022년 60달러대로 떨어졌는데, 엘리엇이 20억달러어치 지분을 매입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한 달 만에 주가가 100달러를 찍었다. 금융 정보 업체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06년까지 행동주의 펀드가 목표로 삼은 기업 75곳은 석 달 만에 주가가 평균 12% 상승했다. 일반 기업의 평균 상승률(1.5%) 보다 10%포인트 높은 수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KB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행동주의 투자 대상이 된 국내 기업 15곳 중 주가가 상승한 기업이 11곳, 하락한 기업은 4곳이었다. 지난해 코스피가 24.9% 하락한 것을 고려하면 선방한 것이다. 최근 얼라인파트너스가 경영권 분쟁을 촉발한 SM엔터테인먼트도 주가가 약 14% 상승하며 52주 신고가를 기록했다. 최준철 VIP자산운용 대표는 “(행동주의 투자자로 인해) 기업의 이런저런 문제점이 고쳐지면 회사가 좋아지고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주가가 오르는 경향이 있다”며 “90년대 장하성 펀드는 단순한 여론전을 펼치는 수준이었지만, 요즘 행동주의 펀드들은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쳐 쌓은 노하우를 통해 여러 변수를 정교하고 실용적으로 판단해 캠페인에 나서기 때문에 단기 주가 상승에 더 효과를 발휘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행동주의 투자를 맹신해서도 안 된다. 행동주의 투자자가 거쳐 간 기업은 장기적으로 주가가 내려가면서 오히려 기업에 해가 된다는 분석도 여럿 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마크 데자딘 교수와 프랑스 파리공립경영대학원(HEC 파리) 로돌페 뒤랑 교수가 내놓은 연구에 따르면, 2000년 이후 행동주의 투자자의 표적이 된 기업 1324곳은 다음 해 회사 가치(밸류에이션)가 평균 7.7% 상승했다. 그런데 이후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해 4년이 지나면 오히려 행동주의 투자 전보다 가치가 4.9%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일반 기업의 가치는 초기에 완만하게 상승하다 5년 후 기업 가치가 약 9%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같은 현상은 여러 기업에서 목격된다. 2015년 삼성그룹에 대한 공격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은 2013년 1월 미국 석유 회사 ‘헤스(Hess)’ 공격에 나섰다. 헤스의 주식을 약 20%까지 사들여 이사회 의석 3개를 확보했다. 그러면서 “경영진의 무능으로 회사가 저평가됐다” “수익이 낮은 자산을 매각하라”며 여론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2013년 초 50달러 선이던 헤스 주가는 빠르게 올라 2014년 7월에는 100달러를 뚫었다.
이후에도 엘리엇은 헤스 경영진을 계속 압박했다. 하지만 압박이 도가 지나치자 회사에 대한 시장 전망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엘리엇의 압박이 회사 경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팽배해지면서 헤스 주가는 2016년 1월 32달러까지 떨어졌다. 기업 가치 개선을 표방한 엘리엇이 손대기 전보다 주가가 36%나 떨어진 것이다. 이처럼 잘 알려지지 않지만 행동주의 펀드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투자에 실패하는 사례가 적지 않고, 시장 평균에도 못 미치는 수익을 낼 때도 종종 있다. 가령 운용 자산 557억달러(약 72조원) 중 20%가량을 행동주의 방식으로 운용하는 엘리엇은 S&P500 지수가 31.5% 상승한 2019년 수익률이 6.5%에 그쳤다. 2017~2021년 5년간 연평균 수익률도 9.7%로 S&P500의 11.3%에 못 미쳤다.
◇일자리·사회적 활동도 위축
직원들 입장에서도 행동주의 펀드의 출현은 달갑지 않은 소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데자딘·뒤랑 교수 연구에 따르면, 행동주의 투자 이후 1년이 지나면 기업들은 평균 4.5% 정도 일자리를 줄였고, 5년이 되면 그 폭은 7%로 늘어났다. 최근 1년간 알파벳·메타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이 6만여 명을 대량 해고한 데에도 행동주의 펀드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많다. 영국계 행동주의 펀드 TCI는 60억달러에 달하는 알파벳(구글 모회사) 지분 약 0.27%를 보유하고 있는데, 지난해 11월 순다르 피차이 알파벳 최고경영자(CEO)에게 서한을 보내 직원 수를 줄이고 비기술직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라고 요구했다. 이후 알파벳은 1만2000여 명을 해고하겠다고 발표했다.
인건비 외에도 행동주의 펀드는 운영비 등 각종 지출을 줄이라고 압박한다. 불필요한 비용 지출을 줄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행동주의 펀드의 개입 자체가 기업에 적지 않은 비용 부담을 안기는 경우도 많다. 미국 화학 업체 ‘듀폰’은 2013년 트라이언 펀드의 공격을 받았다. 트라이언은 듀폰 지분의 2.7%를 취득해 5대 주주가 된 후, 자신들이 듀폰의 경영에 관여하면 회사 비용을 40억달러나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듀폰이 소유하고 있던 골프장과 테니스코트, 영화관 등을 처분하라고 요구했다. 듀폰 경영진은 이 요구를 거부하고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 방어 전략을 맡기는 등 맞대응에 나섰다. 2015년 펼쳐진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듀폰은 트라이언에 이겼지만, 이 승리를 거두기 위해 1500만달러를 썼다. 트라이언도 듀폰을 공격하는 데 800만달러를 지출했다. 이후 듀폰은 전체 직원의 10%인 5000명을 해고했다. 미국 럿거스대 아서 구아리노 교수는 “행동주의 펀드가 실적이 부진한 회사를 구제하고 더 많은 배당금을 주주들에게 줄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기업들이 사회 공헌이나 노동 환경 개선 등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 제고에 도움이 될 경영 활동에 소홀해지는 경향도 뚜렷하다. S&P 글로벌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표적이 된 기업들은 2년 후 기업의 노동·환경·인권 등 사회적 책임 분야 성과가 18% 감소하고, 5년이 지나면 25%까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HEC 파리는 “단기간 성과를 내야 하는 행동주의 펀드 입장에서는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분야에 투자하기란 불가능한 게 현실”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에서는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에 대한 소액주주들의 반응이 점차 시큰둥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민간 경제 조사 기관 콘퍼런스보드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가 시가총액 상위 3000개 회사(러셀 3000)를 상대로 제기한 기후 관련 제안 건수는 2021년 60건에서 지난해 102건으로 급증했다. 그런데 이 제안에 대한 주주들의 찬성률은 2021년 40%에서 2022년 34%로 떨어졌다. 콘퍼런스보드는 “사회적 활동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행동주의 펀드의 제안 품질이 낮은 탓”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행동주의 펀드의 영향을 받은 기업에 대한 투자는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이사회 의장은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거나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주가가 내릴 수밖에 없다”며 “아무리 언론 등에서 주목을 받더라도 행동주의 펀드가 1만원에 산 주식을 2만원에 산다면 위험할 수 있으므로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무엇을 좇는지 명분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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