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최근 ‘구글이 1만2000명을 감원하는 과정에서 알고리즘으로 해고 대상자를 골라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단시간에 대규모 해고 인원이 결정된 데 대해 ‘어떤 법도 어기지 않도록 설계된 영혼 없는 알고리즘이 해고자를 결정했을 것’이란 주장이 해고된 직원들이 개설한 온라인 채팅방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런 의혹을 보도하며 “한때 고용 과정을 돕던 인공지능(AI)이 이제는 누구를 해고할지 고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구글은 “감원 결정에 알고리즘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전문가들은 기업 인사 전반에 AI 알고리즘이 활용되는 추세를 감안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교육·행정·예술·쇼핑 등 사회 전반에 AI가 빠르게 도입되는 가운데 정말 AI가 해고 결정까지 좌지우지하는 세상이 오는 것일까.
◇美 인사 담당 98% “알고리즘 활용”
AI 알고리즘이 해고에 관여한다는 의혹이 불거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9년 IT 전문 매체 더버지는 “아마존이 생산성을 측정하는 자동화 프로그램을 이용해 물류 센터 직원을 해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시스템은 상품 스캔 같은 움직임과 작업 완료에 걸리는 시간 등을 추적해 직원 생산성을 측정한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면 자동으로 경고를 보내고, 경고가 누적되면 해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당시 아마존은 “최종적으론 관리자가 해고에 동의해야 하고, 해고 결정도 사람이 전달한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자동화 프로그램의 존재는 인정한 셈이다. 아마존은 이런 시스템을 배송 기사를 관리하는 데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웃소싱 서비스를 제공하는 액센추어와 페이스북 모회사 메타에서도 작년 해고에 알고리즘을 사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경제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따르면 당시 액센추어를 통해 페이스북과 계약한 직원 60명의 일자리가 없어졌는데, 한 직원이 이 조치에 대한 기준을 묻자 담당자가 ‘알고리즘이 무작위 선택에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액센추어와 메타 측은 이런 주장에 대해 확인을 거부했다. 글로벌 전자 결제 대행사 엑솔라도 비슷한 논란에 휩싸였다. 재작년 러시아 지사 직원을 줄이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업무 소프트웨어 이용 기록, 메일, 채팅 기록 같은 빅데이터를 분석해 해고 대상자를 골라냈다는 의혹이다.
AI가 직원을 해고한다는 사실을 공식 인정한 기업은 아직 없지만, AI가 만든 자료를 인원 감축에 참고 자료로 활용하는 기업은 이미 많다. 올 초 소프트웨어 평가 업체인 캡테라가 미국 기업 인사담당자 300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98%가 ‘올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을 활용할 것’이라고 답했다. 캡테라는 “HR(인사관리) 분야에서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직감을 대체하기 시작했다”며 “이런 기술을 올바른 방식으로 활용하면 관리자가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작아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채용·승진엔 이미 폭넓게 쓰여
전문가들은 윤리적인 문제를 배제하면 AI 알고리즘이 감원 명단을 작성하는 게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미 채용 과정이나 업무 평가, 승진자 결정 등에 AI가 폭넓게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프랑스 화장품 업체 로레알은 채용 과정에 AI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AI가 지원자 경력이나 비자 종류 같은 질문을 던져 기본 사항을 검증하고, 면접 답변을 바탕으로 지원자가 회사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도 평가한다.
IBM은 지난 2019년 “직원이 6개월 안에 퇴직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려주는 시스템을 개발해 사용 중”이라고 밝혔다. 인재가 회사를 떠나기 전 더 적합한 업무나 상담을 제공하는 식으로 미리 대응하는 것이다. 미국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업체 고퓨전은 AI 기반의 직원 성과 평가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직원 업무 활동을 추적하는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상당수다. 뉴욕타임스는 “이런 시스템은 그동안 배송 업무 같은 저임금 직종에서 생산성을 측정하는 데 주로 사용됐지만 이제는 화이트칼라 직종으로도 확산하고 있다”며 “직원 모니터링 결과는 임금 삭감이나 해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했다.
국내에서도 인사관리에 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기업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한 유통 대기업은 작년 승진 심사 과정에서 AI 기반의 평가 시스템을 사용했다. 평가 대상자가 자신의 성과를 문서로 작성해 제출하면 AI 프로그램이 문장을 분석해 역량을 평가하고 상대평가 점수도 제공했다. KB국민은행은 지난 2020년부터 직원 영업점 배치에 AI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전국 영업점의 인력 수요와 직원의 경력·거주지·자격 사항 등을 입력한 후 직원 배치 규칙을 설정해 시스템을 작동하면 1분도 안 돼 자동으로 인사 배치 결과가 나온다. 이후 인사 담당자들이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고 최종 인사 발령을 낸다. 신한은행은 재작년부터 AI가 성과, 역량, 리더십 등 50여 요소를 개인별로 평가한 결과를 승진 등 인사에 활용하고 있다.
채용 과정에서도 AI가 자기소개서를 평가하고 심지어 면접도 진행한다. 면접 대상자의 답변과 시각·음성 정보 등을 분석하는데, 회사에 따라 등급·점수를 매겨 불합격 여부를 가리기도 하고, 실제 사람이 진행하는 면접에서 참고 자료로만 활용하기도 한다. 최근엔 지원자가 제출한 자기소개서를 토대로 AI가 질문을 만들고, 답변을 토대로 추가 질문을 이어가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AI 면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네시스랩 관계자는 “인간은 면접관으로서의 역량이나 당일 기분에 따라 다른 결론을 낼 수도 있지만 AI는 어떤 상황에서든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며 “앞으로 데이터가 쌓이면 ‘면접 때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고성과를 낼 확률이 높다’는 식의 예측 모델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AI가 비용·시간은 줄이고 객관성은 더해주는 장점이 있지만 인사 과정을 전적으로 AI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캡테라의 선임 분석가인 브라이언 웨스트폴은 “알고리즘은 자원이나 지원이 부족해 특정 직원의 업무 성과가 저조해지는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다”고 했다. 회사가 유색인종 직원을 차별해 이직률이 높아진 것인데도 ‘비백인 직원들의 퇴직률이 높으니 우선 해고자로 삼아야 한다’는 식으로 결론 내릴 수도 있다. 앞서 아마존은 AI 채용 프로그램을 개발해 사용하다가 편향성 문제가 나타나 폐기하기도 했다. 그동안 아마존이 남성 직원을 더 많이 채용해왔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학습한 AI도 여성 지원자를 차별한 것이다. 전창배 국제인공지능윤리협회 이사장은 “편향성뿐 아니라 AI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때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도 문제”라며 “인사를 AI에 전적으로 맡기기보단 보조 지표 정도로 쓰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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