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게으름과 나태는 죄악으로 여겨졌다. 고대 그리스에선 게으른 자를 살인을 범한 자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와 마찬가지로 사형에 처했다. 중세 기독교 문화에서 나태는 교만, 탐욕, 질투 등과 함께 7가지 대죄에 포함됐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게으름은 더 이상 옛날처럼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당신이 즐겁게 허비하는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라고 했다. 심리학자이면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은 같은 노벨상 수상자이자 ‘넛지’의 저자인 리처드 세일러를 “게으름이야말로 그가 가진 최고의 자산”이라고 추켜세웠다. 호기심을 느끼는 중요한 문제에만 정신을 집중한 게 그가 경제학자로 성공한 비결이라는 뜻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어려운 일은 게으른 사람에게 시킨다고 한다. 게으른 사람이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쉬운 방법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세상 대부분의 발명품은 우리의 게으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현대사회에서 게으름이 재평가된 것은 공상과 상상력을 부추겨 혁신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나 빌 게이츠는 가만히 앉아 공상하는 시간을 일과에 꼭 포함한다. 더 넓게 생각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려고 이메일 더미와 정보의 바다를 빠져나와 일부러 게으름을 즐기는 것이다. 이렇게 보람이 없거나 즐겁지 않은 활동을 가급적 피하고 무위(無爲)하는 것을 ‘합리적 게으름(rational laziness)’이라고 한다. 중국에도 ‘란런경제(懒人经济·게으름뱅이 경제)’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현대의 편리한 기술을 기반으로 다소 게으른 삶을 즐기는 행위가 소비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2014년 5월 4일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서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팀을 이뤄 탁구를 치고 있다. /로이터

존 케인스는 1930년 쓴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2030년의 삶을 예측했다. 그는 기술 발전으로 인류의 생활수준이 매우 높아질 것이며, 사람들은 하루에 3시간만 일할 것이라고 했다. 제러미 리프킨도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 우리가 로봇을 사용하면 자유 시간의 증가는 필연적이며, 실업이냐 여가냐를 선택하는 문제만 남는다고 했다.

챗GPT 같은 인공지능(AI)과 로봇이 발전할수록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은 로봇과 AI의 몫이 되고, 그럴수록 인간은 게으름을 강요받을 것이다. 인류가 단순 반복 노동에서 해방돼 남는 시간을 창의적인 고부가가치 경제 활동이나 즐거운 여가 활동으로 소비한다면 얼마나 꿈같은 세상이 될까.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비싼 돈을 들여 쌓은 지식과 경험이 쓸모없어지고, 시대의 흐름에 뒤처진 이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수입이 줄어드는 현실을 마주할 가능성이 크다. 자동화에 따른 일자리 대체를 선제적으로 해결하고 기술 진보가 모두에게 혜택이 되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다. 그래야 합리적 게으름의 가치도 더욱 빛날 것이다.

WEEKLY BIZ Newsletter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6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