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기업의 주주총회 시즌이다. 이때가 되면 경영권을 놓고 주주 간 분쟁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올해는 더 세게 붙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6일까지 국내 기업이 경영권 분쟁 관련 소송에 돌입한 건수는 총 92건이다. 2020년(같은 기간) 35건에 비해 크게 늘었다. 터닝메카드·헬로카봇 등을 판매하는 완구업체 손오공에는 주주명부 열람 청구 소송이 제기됐다. 주주명부 열람은 주주명부를 확보한 뒤 서한을 발송해 인수합병이나 소액주주운동을 하는 데 선행되는 기본 절차다. 코스닥 상장사 삼영이엔씨와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씨아이테크 등도 이사 해임·선임 등을 위해 주주총회 소집을 허가해달라는 소장을 받았다.
소송까지 가지 않더라도 세간의 주목을 끈 경영권 분쟁도 올해 유독 많다. SM엔터테인먼트 경영권을 놓고 카카오와 하이브가 화끈한 지분 확보 경쟁을 벌였고, 대기업인 고려아연도 경영권을 놓고 공동 창업자 가문 간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다.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이사회 의장은 “오랜 기간 큰 문제 없이 동업이나 가족 경영을 해온 대기업들도 4·5세대 경영에 들어가면서 사이가 멀어져 분쟁을 겪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주주행동주의’도 경영권 분쟁을 키우는 데 한몫한다. 주주행동주의는 주주들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뜻한다. 글로벌 의결권 조사기관 인사이티아(Insightia)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주행동주의 대상 기업 수는 2018년 16건에서 지난해 47건으로 늘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주로 이사나 감사 선임을 요구하거나 반대하는 방식으로 경영에 참여하는데, 지난 10일 현재 주주 제안으로 이사·감사·감사위원 선임 안건이 표결에 부쳐진 건수는 22건에 이른다. 작년 같은 기간(8건)보다 1.5배로 늘어난 수치다.
◇경영권 분쟁에 웃는 투자자들
이처럼 경영권 분쟁이 늘자 주식 투자자들은 신이 났다. SM의 경영권 분쟁이 터지자 한 달 전만 해도 9만원이던 주가는 한때 16만원을 넘어섰다. 김정민 켐벨루텐스 전무는 “경영권을 차지하려는 큰손이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웃돈을 주고 주식을 사들이고, 일반 개미투자자들까지 가세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경영권 분쟁에 휘말린 기업의 주가는 단기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굵직한 경영권 분쟁이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곤 했다. 지난 2020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별세하자, 한진그룹 경영권을 놓고 조원태 한진칼 회장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KCGI(강성부 펀드)·반도건설 등 3자 주주연합 간 다툼이 벌어졌다. 2019년 말 3만원 선에 머물던 주가는 다음 해 4월에는 11만원까지 올랐다.
2003년에는 현대그룹·KCC 간 경영권 분쟁이 일어나 현대그룹 지주사인 현대엘리베이터(현 현대엘리베이) 주가가 폭등했다.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사망한 후 현대엘리베이터의 외국인 지분율이 10%를 넘어서자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우려가 불거졌고, 범현대가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사들여 방어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범현대가 가운데 하나인 KCC가 현대그룹 인수를 공식 선언하면서 경영권 분쟁이 발생했다. KCC는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식 57만1500주(지분율 8.01%)를 주당 7만원에 2개월간 공개매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4000원 선이던 주가가 8개월 후 10만원에 육박했다. 외국계 투자은행 CIMB 한국지점 이기운 대표는 “당시 KCC 진영에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매입 업무를 담당했는데, 가격과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주식을 사들인 기억이 생생하다”며 “지분 경쟁에 돌입할 경우 경영권을 갖지 못하면 나머지 주식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영권 분쟁은 장기적으로는 주가에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지분 싸움이나 법적 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상당한 비용이 발생할 뿐 아니라 경영상 차질이 빚어지거나 기업 이미지가 훼손되는 경우도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영권 분쟁이 끝날 조짐이 보이면 눈치 빠른 투자자들은 재빨리 발을 빼고, 주가는 크게 떨어져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SM의 경우 지난 12일 카카오가 경영권을 갖기로 결정하면서 경영권 분쟁이 끝나자 다음 날 주가는 하루 만에 23%(3만4700원) 급락했다.
◇유럽·일본도 잦은 경영권 분쟁
한국뿐 아니라 유럽이나 일본에서도 종종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다. 최준철 VIP 자산운용 대표는 “가족 경영 기업이 많은 유럽에서도 경영권을 놓고 서로 다투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데, 어떨 땐 한국보다 더 살벌하다”고 했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가 대표적이다. 구찌는 창업자 구찌오 구찌의 손자 세대에서 경영권 분쟁이 시작됐는데,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밀라노 시내 한복판에서 청부 살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1993년 가족 경영은 끝났고, 회사는 투자은행에 인수됐다. 이를 소재로 한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가 제작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가구 업체 ‘오쓰카’의 창업주가 딸과 경영권 다툼을 벌여 화제가 됐었다. 창업주 오쓰카 가쓰히사는 2009년 구미코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아버지가 고수하던 고급화 전략을 버리고 중저가 가구 판매에 주력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가쓰히사는 5년 뒤 딸을 사장에서 해임하고 일선에 복귀했다. 그러자 딸은 다음 해 주주들을 모아 아버지를 해임하고 다시 사장 자리에 올랐다. 결국 창업주 가쓰히사는 2015년 다쿠미 오쓰카라는 가구 회사를 별도로 세웠다.
의외로 ‘자본주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는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그리 흔치 않다. 창업주나 대주주 일가가 직접 경영에 참여하기보다 전문 경영인과 이사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행 때문이다. 차등의결권(특정 주식에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 황금주(수량이나 비율에 관계없이 주요한 경영 사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식), 포이즌필(경영권 침해 시도가 발생하는 경우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 등 다양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제도적으로 갖춰진 덕분이기도 하다.
이기운 대표는 “미국에는 사주가 경영권을 갖는다는 개념 자체가 희박한 편”이라며 “오너의 전횡을 막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기업의 주인이 더 책임감을 갖고 개인 재산을 내서 어려워진 회사를 구하는 등 장점도 있기 때문에 어떤 체제가 더 낫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WEEKLY BIZ Newsletter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6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