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아베크롬비 앤 피치라는 미국 패션 회사가 있습니다. 1892년 아웃도어 브랜드로 시작한 이 회사는 여러 부침을 겪은 뒤 1980년대 후반부터 젊고 부유한 고객층을 공략하는 고가 전략을 구사합니다. 백인 모델을 앞세운 도발적인 광고로 화제를 모았고, 매장 직원도 외모가 준수한 백인들만 고용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아베크롬비는 이런 전략을 고수합니다. 아시아인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티셔츠를 내놓는가 하면, 최고경영자가 대놓고 “우리 옷은 잘생기고 멋진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니 뚱뚱한 사람들은 안 입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브랜드에 대한 호기심과 ‘쿨’한 이미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소비자를 도발하는 전략은 2000년대 소비자들에겐 끔찍한 성차별과 인종차별주의에 불과했습니다. 각지에서 아베크롬비에 대한 소송과 불매운동이 이어졌고, 브랜드 이미지와 기업 가치는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2007년 73억달러에 이르렀던 시가총액은 한때 5억달러까지 추락했습니다. 2017년에는 경쟁사인 아메리칸 이글에 회사를 매각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그 사이 여러 번 경영진을 교체하고 뒤늦게 포용적인 전략으로 선회했지만 망가진 회사를 되살리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베크롬비의 성장과 몰락은 오늘날 기업들에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는 어제까지 잘 작동했던 전략이 언제든 제 발목을 잡는 함정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자들의 가치관과 행동방식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주 커버스토리에서는 점점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소비 트렌드와 이에 따른 기업들의 대응법을 다뤘습니다. B8면에서는 시대 변화에 적응해가며 위기를 기회로 만든 장난감 회사 마텔과, 위기 관리에 실패해 곤경에 빠진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의 대조적인 사례를 소개합니다.

지난 주말 산책하다 보니 산수유 가지에 벌써 노란 꽃망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안팎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요즘이지만, 어쨌든 봄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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