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의균

미국의 생명공학 스타트업 레트로 바이오사이언스는 “인간의 건강 수명을 10년 연장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제시하는 기업이다. 이 회사는 작년 4월 1억8000만달러(약 2300억원)의 초기 투자금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2021년 창업한 신생 회사에 거액을 베팅 한 큰손이 누구인지 공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레트로 바이오사이언스는 ‘미스터리한 스타트업’으로 불렸다.

궁금증은 최근 MIT 테크놀로지 리뷰 보도로 풀렸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큰손은 챗GPT로 세상을 뒤흔든 오픈AI 창업자 샘 올트먼이었다. 그는 8년 전 젊은 쥐의 혈액을 주입받은 늙은 쥐가 부분적으로 원기를 회복했다는 실험 결과를 접하고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노화와의 전쟁’에 베팅한 거물은 올트먼뿐만이 아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 같은 억만장자가 관련 스타트업에 잇달아 투자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이사회 의장으로 있는 헤볼루션재단은 작년 노화 연구에 매년 10억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영국 미디어 회사 ‘퍼스트 롱제비티’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장수 연구 기업들의 투자 유치액은 52억달러(약 6조8000억원)에 달했다. 큰손들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노화를 거스를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겨왔던 인식도 변하는 분위기다. 노화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데이비드 싱클레어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작년 6월 한 행사에서 “언젠가는 의사에게 가서 10년을 되돌릴 수 있는 약물을 처방받는 일이 일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생체 시계 되돌리는 역노화에 뭉칫돈

노화 방지에 투자하는 거물들이 최근 주목하는 분야는 ‘재프로그래밍’이다. 세포를 다시 예전 상태로 되돌리는 역노화 개념으로, 이미 동물 실험 단계에선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올 초 미국 생명공학 기업 ‘리주버네이트 바이오’ 연구진은 생후 124주 된 나이 든 생쥐에게 세포 역분화 인자를 주입, 평균 수명을 18주 늘리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대조군인 생쥐는 평균 9주만 더 살았다. 같은 시기에 싱클레어 교수가 이끄는 하버드대 연구진도 국제 학술지 ‘셀’에 비슷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DNA를 손상시켜 인위적으로 노화시킨 생쥐에게 역분화 인자를 주입했더니 생쥐는 다시 젊은 상태로 되돌아왔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기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작년 1월 출범한 알토스 랩스다. 설립하기도 전에 30억달러(약 3조9000억달러)의 투자금을 끌어당겼는데,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와 러시아 출신 억만장자 유리 밀너 등이 투자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알토스 랩스는 홈페이지에 “우리 목표는 ‘세포 회춘 프로그래밍’을 통해 질병, 부상,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올트먼이 투자한 레트로 바이오사이언스, 구글 자회사인 칼리코도 세포 재프로그래밍을 주요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업체들이 뛰어들면서 인재 확보 경쟁도 치열해졌다. 알토스 랩스는 20여 명의 전문가를 데려오기 위해 1인당 최고 100만달러(약 13억원)의 연봉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가 선임 과학 고문으로 모셔온 일본인 야마나카 신야 박사는 특정 인자 4가지를 주입해 체세포를 줄기세포 상태로 되돌린 연구로 201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전문가다. 레트로 바이오사이언스의 조 베츠라크루아 CEO는 세포 재프로그래밍 전문가인 알레한드로 오캄포 박사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에 날아가 회사 고문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재프로그래밍을 통한 역노화 분야는 아직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이뤄지지 않은 초기 단계다. 동물 실험에선 세포를 되돌리는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종양이 발생하는 부작용도 보고됐다.

노화 세포 제거 기술에도 투자

큰손들의 관심을 받는 또 다른 치료법은 노화 세포 제거다. 세포를 회춘시키는 재프로그래밍과 달리 노화 세포를 아예 없애는 개념이다. ‘좀비 세포’로도 불리는 노화 세포는 주변 정상 세포에까지 영향을 미쳐 뇌졸중, 골다공증, 근육 약화 같은 다양한 노화 관련 질병을 부른다. 미국 메이요 클리닉 연구진은 지난 2016년 쥐에 노화 세포를 제거하는 물질을 투여해 수명을 17~35% 늘린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런 연구에 매진하는 기업 중 하나가 2018년 나스닥에 상장한 ‘유니티 바이오테크놀로지’다. 상장 전 시리즈B 단계에서 1억5100만달러(약 2000억원) 투자금을 조달했는데, 제프 베이조스와 피터 틸이 각각 자신의 벤처캐피털을 통해 투자에 참여했다. 이 회사는 현재 안구 혈관에 축적된 노화 세포를 제거해 노인성 안과 질환을 치료하는 약물 ‘UBX1325′를 개발해 임상시험 중이다.

이 밖에 젊은 혈액에만 있는 특정 인자를 찾아내 나이 든 몸에 주입하는 방식, 항노화 효과를 보인 기존 약물을 활용하는 방식 등도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가운데 당뇨병 치료제인 메트포르민의 경우 동물 실험에서 수명을 늘리는 효과가 관찰됐는데, 인간을 대상으로 이를 검증하는 대규모 임상시험이 계획돼 있다. 만약 임상시험이 성공하고 미 식품의약국(FDA)이 메트포르민을 노화 치료제로 승인하게 되면 노화를 하나의 질병으로 인정받게 되는 셈이다. 이미 시판 중인 약인 만큼 상대적으로 안전성이 높고, 특허가 만료돼 가격이 저렴한 것도 장점이다.

업계에선 노화 치료에 대규모 자금이 몰리면서 관련 연구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노화와의 전쟁이 결국 소수 부자만을 위한 값비싼 치료제로 결론 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치료제를 소수가 독점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만 악화시키게 될 것이란 지적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장수 과학의 발전은 부와 건강, 권력의 빈부 격차를 확대할 위험을 갖고 있다”며 “노화 방지 과학이 시장에 가까워질수록 치료제가 얼마나 공정하게 분배되는지에 대한 윤리적인 의문도 커질 것”이라고 전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보다는 정부가 주도해 관련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작년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을 중심으로 14개 기관·대학·병원이 참여한 노화융합연구단이 만들어졌다. 2028년까지 450억원을 투자해 노화 진단·지연·치료 기술을 개발한다는 목표다. 권은수 연구단 단장은 “생물학적 나이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진단 영역부터 노화 세포 제거 등을 통한 치료 영역까지 모두 연구하고 있다”며 “몇 년 전만 해도 노화를 치료한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했지만 요즘엔 극복 가능한 영역이라고 보는 쪽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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