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위기가 터지기 전에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처럼 의대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는 아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서울 상위권 사립대 공대와 지방 의대를 놓고 저울질하곤 했습니다. 지금처럼 후자로 저울추가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았던 시절이죠.
상위 0%대씩이나 되는 수재들이 후일 직장에서 퇴출될까 두려워서 의대로 몰리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체로 사회적 신분의 ‘바닥’을 일찌감치 높게 확보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고소득을 얻는 평생 자격증을 스무살 나이에 눈앞에 둘 수 있다는 게 의대 진학의 요체입니다.
공대 나온 평범한 직장인에게 수재들은 매력을 못 느낍니다. 고도 성장기 때 ‘고시 급제자’가 누린 혜택이 쪼그라들었다는 것도 간파하고 있습니다. 제도를 만들고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이제는 사회적 감시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금전적 보상도 옛날보다는 약합니다. 게다가 나중에 고관대작을 맡거나 창업으로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죠. 고교 최상위권이 의대로 몰리는 건 각자에게는 합리적 선택입니다.
그런데 머리 좋은 이들이 어린 나이에 ‘바닥’을 높게 확보하는 데 주력하다 보니 ‘하늘’에 도달해보려는 도전과는 멀어지는 듯 합니다. 의대로만 두뇌가 쏠리면 빌 게이츠나 샘 올트먼 같은 세상을 흔드는 혁신가를 배출할 가능성을 높이기 어렵습니다. 글로벌 차원의 능력 발휘와도 거리가 있는 쪽입니다. 유럽 특파원 시절 한국인 주재원 자녀가 세계 정상급 대학에 합격하고도 한국에 있는 의대를 선택해 귀국하는 걸 보고 아쉬웠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미국에서도 한국 뺨치는 초고액 입시 컨설팅 열풍이 분다는 소식을 다뤘습니다. 명문대를 갈망하는 열기가 미국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학벌은 미국인에게도 소중하고 민감한 자본 요소죠. 그러나 특정 전공에 일방적으로 몰리지는 않는다는 게 우리와 다릅니다. 이땅의 똑똑한 청춘들이 꿈꾸는 길이 여러 갈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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