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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사는 고등학교 교사 로리 바이스(65)씨는 몇 년 전부터 수업 준비나 시험 채점이 버거워졌다. 익숙하던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기 어려워졌고, 학생의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어졌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치매를 앓은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이 자신에게도 현실로 다가왔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결국 62세였던 2020년 바이스씨는 치매 전 단계인 경도 인지 장애 진단을 받았다. 뇌에 치매 원인 물질인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쌓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이스씨는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아직 젊은 나이인데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고 했다.
기적처럼 희망이 찾아왔다. 친구가 치매 치료제인 도나네맙 임상 시험 지원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알려줬다.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가 개발한 도나네맙은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을 제거해 치매 초기 증상을 개선해 준다. 바이스씨는 다른 지원자 1700여 명과 임상 시험에 참여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기억력을 회복했고, 방향 감각도 되찾아 다시 운전할 수 있게 됐다.
고통스러운 ‘망각의 질병’ 치매를 극복하는 길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의학계는 효과가 어느 정도 검증된 치료제 등장으로 치매를 정복하는 여정이 ‘최종 단계의 시작(beginning of the end)’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치매는 1906년 독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가 전체 치매의 70% 안팎을 차지하는 알츠하이머병을 보고한 이후로 100년 넘도록 뚜렷한 치료법이 없는 불치병이었다. 하지만 근년에 빠른 속도로 치매를 극복할 수단이 발달하고 있어 환자와 가족들에게 서광을 비추고 있다.
치매 정복으로 가는 길은 삼각 편대가 이끌고 있다. 치료제 개발 경쟁에 뛰어든 제약사들의 연구 성과가 무르익고 있고, 조기 진단과 환자 돌봄을 개선하는 인공지능(AI)과 로봇의 성능이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치매 퇴치를 국가적 과업으로 여기는 선진국들은 예산과 인력을 집중 지원하는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며 뒤를 받치고 있다.
효능 개선된 치료제, ‘게임 체인저’ 되나
전 세계 치매 환자는 2019년 기준 5500만명에 이른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50년이 되면 1억3900만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치매가 초래하는 갖가지 사회적 비용은 1조3000억달러(약 1700조원)에 달하고, 배우자·자녀가 치매 환자를 돌본 시간을 합치면 890억시간에 이른다고 WHO는 본다. 게다가 치매는 세계인의 사망 원인 7위에 해당한다.
이처럼 치매를 둘러싼 인류의 고통이 크지만 최근 치료제 개발에 속도가 붙고 있어 환자와 가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선두에 있는 두 치료제가 ‘게인 체임저’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하나는 일본 제약사 에자이와 미국 바이오 기업 바이오젠이 공동 개발한 레카네맙(제품명 레켐비)이고, 다른 하나는 일라이릴리의 도나네맙이다. 둘 다 정맥 주사로 주기적으로 투여하는 방식이다.
레카네맙과 도나네맙은 뉴런 주변의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을 제거하는 데 뚜렷한 효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레카네맙은 임상 시험에서 인지 기능 저하 속도를 27% 늦춰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월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도나네맙도 최근 판매 승인을 받기 전 최종 단계인 3상 임상 시험에서 긍정적 결과를 얻었다. 지난 3일 일라이릴리는 “도나네맙을 투여한 환자는 위약(僞藥·placebo)을 투여한 대조군에 비해 치매 증상 악화 속도가 35% 늦춰졌고, 일상생활 능력도 40%가량 덜 감소했다”고 밝혔다. 일라이릴리는 도나네맙이 올해 하반기에는 FDA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치매를 일으키는 다른 원인을 겨냥한 치료제도 개발되고 있다. 뉴런 내부에 타우 단백질이란 물질이 비정상적으로 엉키면서 쌓이는 현상도 치매 원인으로 지목되는데, 이러한 타우 엉킴을 해소하는 치료제 개발에도 글로벌 제약사들이 나서고 있다.
물론 막대한 연구 개발비가 투입된 만큼 치매 치료제는 저렴하지 않다. 레카네맙의 연간 투약 비용은 2만6500달러(약 3500만원)에 이른다. 다만 치료제가 대중화되면 가격이 내려갈 여지가 있다. 레카네맙을 만드는 에자이는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을 상당량 제거한 이후 유지 단계에서는 투여 주기를 늘릴 수 있고, 그러면 비용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고 설명한다.
치료제와 별개로 조기 진단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지난해 말 미국 워싱턴대 연구진은 혈액 검사로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뉴런 주변에 쌓이고 있음을 알아낼 방법을 찾아냈다. 치매를 일으킬 수 있는 유전자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10년 전만 해도 치매와 관련된 유전자가 10가지 정도만 알려져 있었지만, 현재는 치매와 연관된 것으로 판단돼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유전 물질이 70가지 이상”이라고 밝혔다.
‘반려 로봇’이 치매 악화 막는다
치료제 개발이라는 의학적 영역의 노력과 함께 로봇 공학이 고도로 발달하고 있어 치매 환자 치료·돌봄에 청신호가 들어오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요양 시설에서 거주하는 80대 치매 환자 질 브레켄리지씨는 요즘 ‘친구’의 도움을 받고 있다. 바로 어린아이 키만 한 인간형 로봇 ‘페퍼(Pepper)’다. 소프트뱅크 로보틱스가 만든 페퍼는 가슴에 단 화면을 통해 환자에게 옛날 사진을 보여주며 간단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주거나 환자들이 자신을 따라서 간단한 율동을 하게 유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환자의 기억력이나 인지 능력이 저하되는 속도를 늦춘다.
미국 텍사스대 연구진은 반려 동물 로봇과 함께 생활한 치매 환자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돼 스트레스나 불안감이 줄어든다는 결과를 얻었다. 덕분에 환자들이 진통제나 향정신성 의약품을 덜 복용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로봇 반려견 기업 톰봇은 “치매 환자들은 스스로 살아있는 동물을 키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우리가 로봇 반려견을 개발했다”고 설명한다. 시장조사 기관 퓨처 마켓 인사이츠는 환자들의 치료를 돕는 헬스케어 반려 로봇 시장의 규모가 올해 22억달러에서 2033년에는 117억달러 선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가상현실과 AI도 치매 퇴치
로봇 외에도 가상현실(VR) 기기가 치매 환자의 증상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막는 역할을 하고, AI는 치매 발병 가능성을 사전에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
치매 환자를 위한 VR 콘텐츠를 개발하는 미국 기업 ‘마인드VR’은 환자가 과거 거주했던 지역이나 인상 깊었던 여행지에 다시 방문한 것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기억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머릿속에 있는 옛날 장면을 기억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는 안경처럼 착용하면 만나는 사람 이름을 알려주고, 목적지와 일정을 안내해주는 치매 환자용 증강현실(AR) 기기도 개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AI는 의료진이 치매를 조기에 진단하고, 환자별로 최적화된 치료법을 찾도록 돕는 비서 역할을 한다. 뇌를 자기공명영상(MRI) 촬영하지 않고도 망막 사진을 AI가 분석해 치매를 조기에 진단하는 방법이 개발되고 있다. 의학 전문지 랜싯에 따르면 이러한 망막 사진 분석법의 정확도는 83.6%까지 높아졌다.
발병 가능성을 예측하는 AI 모델도 개발 중이다. 미국 플로리다대 연구진은 지난 2월 “특정인의 보건 기록을 분석해 실제 치매 진단 시점보다 최장 5년 앞서 치매 발병 가능성을 알아내는 AI 모델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AI 모델이 진료·검진 기록에서 비만, 고혈압,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같은 치매 위험 인자를 찾아내 분석한다. 여기에 정기적 운동 여부 같은 라이프스타일과 각종 약물 복용·질병 치료 이력까지 함께 분석해 수년 후에 치매를 앓을 가능성이 있는지 미리 잡아낸다.
환자의 건강과 생활 방식 관련 정보를 입력하면 치매 환자별로 최적화된 치료법을 의사에게 조언해주는 AI 모델도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유메서드라는 회사가 개발한 AI 시스템은 수면 스타일, 갑상선 기능 이상, 영양소 섭취 부족처럼 치매와 관련 있는 여러 신체 현상을 평가한 다음 의사에게 처방약을 추가하거나 변경하라고 조언해준다.
선진국들, 치매 극복에 필사적
2019년 기준으로 세계 치매 환자 160만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절반이 선진국 국민이었다. 따라서 선진국들은 치매 극복을 국가적 과제로 여기고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정부 정책적 차원에서 치매 대응은 크게 두 축이다. 치료·돌봄 인프라 구축과 치료제 개발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빨리 정부 차원의 치매 대책을 세운 곳은 프랑스다. 2001년 ‘1차 국가 치매 계획’을 수립해 지역마다 기억 치료 센터를 설치했다. 2차(2004~2007년)는 지역 노인 전문 코디네이션 센터, 3차(2008~2012년)는 치매 맞춤형 전문 의료 시설을 만드는 데 각각 중점을 뒀다. 4차 계획(2014~2019년)부터는 치매 극복 연구에 비중을 두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치료제 개발에 가장 적극적으로 예산을 투입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2015년 한 해 6억달러 수준이었던 미국 정부의 치매 연구·개발(R&D) 예산은 올해 6배 수준인 37억달러까지 불어났다. 현재 치매 관련 임상 시험 459건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인구 1000명당 치매 환자가 가장 많은 일본도 치매 극복에 정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3년 의료 인력으로 구성된 ‘치매 초기 집중 지원팀’을 출범시켰다. 이 팀은 고령자의 집을 방문해 치매 조기 진단과 치료를 담당한다. 여기에 더해 영양사, 치위생사, 물리치료사, 의사, 사회복지사 등 개별 분야 전문 인력이 30명 이상 참여하는 지역 돌봄 회의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방안을 구상한다.
영국도 일본처럼 환자 밀착 관리 체계를 갖췄다. 영국 보건부는 2015년부터 모든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의사를 치매 케어 코디네이터로 지정하고 있다. 코디네이터는 환자와 상의해 맞춤형 치료·돌봄 계획을 수립한다. 또한 요양 시설 담당자, 사회복지사, 임상 심리학자, 주택 수리업자 등을 모아 개별 치매 환자에게 최적화된 의료·요양 서비스를 찾는 역할도 한다.
디지털 치매와 미세 먼지가 변수
치매 정복으로 가는 길에서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지만, 치매 확산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디지털 치매’와 미세 먼지의 위험성이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변수다. 이런 신체 밖의 외생적 위험 요인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치매 극복과 관련한 인류의 도전 과제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디지털 치매는 악영향이 단순히 디지털 기기 의존이 유발하는 기억력 저하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유년기의 과도한 영상 시청이 나중에 치매를 앓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영상을 너무 많이 보면 신경망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자라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노화에 의한 퇴행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현재 어린이·청소년인 이들이 고령층에 접어든 2060~2100년 사이 치매 발병이 현재의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미세 먼지도 뇌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지난달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은 “연간 초미세 먼지 노출량이 1㎥당 2마이크로그램씩 증가할 때마다 치매 위험이 17% 높아진다”고 발표했다. 과학자들은 몸 안에 침투한 미세 먼지가 만성 염증을 일으키거나, 치매 원인 물질인 베타 아밀로이드 단백질이 쌓이는 속도를 높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나친 가공식품 섭취 역시 치매 위험을 키운다. 브라질 상파울루대 연구진이 지난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설탕·소금·지방 함량이 많은 햄버거·피자·소시지·감자튀김 같은 ‘초가공식품(ultraprocessed food)’을 통해 하루 권장 칼로리의 20% 이상을 섭취하면 치매 발병 위험이 커진다. 1만명을 10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초가공식품을 많이 섭취한 사람은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인지 장애 발생 속도가 28% 빨라졌다.
치매는 치료법 개발만큼이나 생활 습관 개선을 통한 예방이 중요하다. NIH는 “건강한 식단, 금연, 적당한 수준의 음주, 운동, 적극적인 두뇌 활동 등을 실천하면 치매 발병 위험을 60%까지 낮출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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