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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의균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시 동쪽에 있는 기쿠요초에서는 요즘 땅값이 들썩이고 있다. 최근 이 지역 땅값은 1년 전보다 32% 올랐는데, 일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상승률이다. 기쿠요초의 한 70세 농부는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입지에 따라서는 3.3㎡(평)당 6만엔 정도 하다가 40만엔까지 오른 땅도 있다”고 했다.

인구 4만3000명의 조용한 농촌의 땅값이 수직 상승하는 이유는 이 일대가 일본 최대의 반도체 허브로 탈바꿈한다는 기대가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파운드리 세계 1위인 대만의 TSMC가 내년 말 가동을 목표로 기쿠요초에 공장을 짓고 있다. 반도체 산업 부활을 노리는 일본 정부는 4760억엔(약 4조3000억원)을 TSMC에 지원한다. 이미 구마모토현에는 소니와 도쿄일렉트론의 반도체 관련 공장이 돌아가고 있다. TSMC 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면 고급 인력이 대거 유입돼 지역 경제가 꽃을 피울 수 있다는 희망이 커지고 있다.

구마모토현은 오랜 저성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서서히 활기를 되찾고 있는 요즘 일본 경제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역이다. 구마모토현뿐 아니라 최근 일본 전역에서 ‘잃어버린 30년’을 딛고 재도약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달 들어 닛케이평균(이하 닛케이)은 33년 만에 3만3000선을 돌파했다. 부동산 가격도 도쿄를 중심으로 뚜렷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소비자 물가가 3%대로 올라 고질병인 디플레이션도 치유될 기미가 보이고 있다.

그래픽=백형선
그래픽=백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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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금리와 엔화 약세가 경기 부양의 발판이지만, 일본 경제의 반등세를 금융 완화 정책만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막대한 정부 지원금을 쏟아붓는 것을 중심으로 산업 경쟁력 강화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미·중 갈등이 고조되면서 일본이 대체 투자국으로 각광받는 지정학적 효과도 누리고 있다.

일본은 2021년 2.1%, 2022년 1.1%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1.3%, 내년 1% 성장할 것으로 내다본다. 이런 전망이 현실이 되면 일본은 17년 만에 4년 연속 1% 이상의 경제 성장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툭하면 성장률이 0%대에 그치거나 역성장하던 시기에서 탈피해 점진적으로 순항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피어오르고 있다.

올해 G7 주가 상승률 1위

요즘 일본 경제가 뜨겁다는 건 자산 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닛케이는 19일 기준 작년 말 대비 27.9% 올랐는데, 미국 S&P500 상승률(14.8%)의 2배에 가깝다. 올 들어 닛케이는 G7의 나라별 대표지수 중 최고 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영국과 캐나다의 주가 상승률이 1~2%대에 그치는 것과 분명하게 대비된다. 닛케이는 기술주 중심의 미국 나스닥지수에만 뒤질 뿐이다. 이에 따라 올해 버블 붕괴 이후 33년 만에 닛케이가 3만 선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그래픽=김의균

지리멸렬하던 부동산 가격도 반등세에 힘이 붙었다. 부동산 정보회사 후도산게이자이에 따르면 지난 3월 수도권 신축 맨션의 평균 가격이 1억4360만엔으로 1973년 조사 시작 이후 처음으로 1억엔을 넘었다. 후도산게이자이는 “역세권에 2억~4억엔을 넘나드는 고가 맨션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부동산 정보회사 간테이에 따르면, 지난 3월 도쿄 23구의 70㎡짜리 구축 맨션 평균 가격은 2000년대 들어 처음으로 7000만엔을 넘어섰다. 1999년 가격(3475만엔)의 2배가 넘는다.

그래픽=백형선

주택 월세 흐름도 경기 회복을 반영하고 있다. 도쿄 23구의 지난달 1㎡당 월세는 4153엔까지 올랐는데, 2004년 이후 최고치를 5개월 연속 경신한 것이다. 다카하시 마사유키 간테이 수석연구원은 “올해는 도쿄 도심으로 인구가 유입되는 현상이 뚜렷하다”고 했다.

단순히 자산 가격만 오른다고 보면 오산이다. 일본의 올해 4월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1조8951억엔으로 작년 4월보다 76.3% 늘었다. 내수가 살아나고 수출도 회복되는 흐름이 뚜렷하다. 기업들의 실적 향상이 돋보인다. 닛케이보다 반영하는 기업 숫자가 더 많은 토픽스지수를 구성하는 기업의 57%가 지난 1분기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는데, 이런 기업들의 순이익은 작년 1분기 대비 62% 늘었다.

그래픽=백형선

고용에도 훈풍이 분다. 지난 4월 기준 일본의 실업률은 2.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한국과 함께 가장 낮다. 후생노동성 발표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대졸자 취업률은 97.3%에 달했다. 사실상 완전 고용이 이뤄지고 있다. 고용 시장이 호조를 보이자 일본인들의 주머니도 두둑해지며 소비도 살아나고 있다. 최대 노동단체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봄 협상에서 평균 임금이 30년 사이 최고치인 3.66% 올랐다. 인력이 부족해지자 임금을 올려 인재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디플레 탈출하나, 9개월 연속 3% 이상 물가

일본에서는 올해를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는 변곡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있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작년 8월 이후 9개월 연속 3% 이상에서 유지되고 있다. 도쿄 증권가에서 34년간 일한 마쓰바라 히로유키(松原浩之) 글로벌X재팬 이사는 WEEKLY BIZ 줌 인터뷰에서 “올 들어 임금 상승률도 3%를 크게 웃돌았다”며 “그동안 디플레이션 때문에 일본에 투자를 안 했다면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고 했다. 노무라증권은 “주가가 오르는 것도 드디어 디플레이션의 끝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픽=백형선

일본은행이 초저금리를 유지할 전망이기 때문에 모처럼 피어오른 투자 열기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16일 “물가가 목표치인 2%를 넘긴 해도 안정적으로 앞으로도 2%대를 유지할지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초저금리를 당분간 이어가겠다고 시사한 것이다. 글로벌X재팬의 마쓰바라 이사는 “전쟁이나 원자재 가격 상승 같은 외부 요인이 없어도 2% 물가상승률을 달성할 수 있을 때까지 금융 완화는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워런 버핏도 일본 투자 늘려

해외발 투자금도 물밀듯 들어온다.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회장은 일본의 5대 종합상사(이토추·마루베니·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의 지분을 늘리고 있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지난 19일 자회사를 통해 보유한 5대 종합상사 지분을 평균 8.5% 이상으로 늘렸다고 밝혔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최근 11주 연속으로 일본 주식을 순매수했다. 엔저를 노린 외국인 관광객도 폭발적으로 들어온다. 지난 4월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도 200만명 수준으로 작년 4월(14만명)에 비해 크게 늘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경기 전망도 밝다. 최근 블룸버그는 토픽스지수 구성 기업의 주당순이익(EPS)이 1년 후에는 5.2%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블룸버그 전망치를 보면, 12개월 이내에 일본에 경기 침체가 찾아올 확률은 30%로 미국(65%), 유럽(40%)보다 낮다. 일본 기업들이 보유한 현금도 꾸준히 늘었다. 2008년 168조엔에서 지난해 말에는 321조엔까지 증가했다. 투자 여력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김채윤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구매관리자지수(PMI)가 모두 경기 확대의 분기점인 50포인트를 상회한다”며 “경기 정상화의 궤도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래픽=백형선

정책 일관성, 외국인의 장기 투자에 유리

한동안 혁신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던 일본 기업들도 다시 경쟁력을 회복하는 추세다. 특히, 부활을 노리는 반도체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체 상위 15곳 중 8곳이 일본 기업이다. 미국은 반도체 완성품 제조업체나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가 많다면, 일본은 주요 반도체 기업 중 장비·소재 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70% 정도다. 요즘은 미·중 갈등이 격화되자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TSMC, 마이크론, 삼성전자와 같은 글로벌 반도체 강자들이 속속 일본 투자를 결정했다.

반도체 외에도 혁신을 선보이며 주목받는 기업들도 등장하고 있다. 우주 기업 아이스페이스는 세계 최초의 민간 달 착륙선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제약사 에자이는 미국의 바이오젠과 공동으로 치매 치료제를 개발해 세계 바이오업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일본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같은 콘텐츠 산업도 빠른 속도로 시장이 커지고 있다.

일본 경제가 반전을 이뤄낸 배경에는 정책적인 뒷받침도 한몫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작년 6월 내놓은 종합 경제대책은 기술, 에너지 전환, 교육, 관광까지 경제 부흥을 위한 ‘마스터플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최첨단 반도체에 39조엔을 투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으며, 이런 정부 방침에 따라 도요타·소니·소프트뱅크 등 8개 기업이 합작으로 라피더스라는 첨단 반도체 회사를 만들었다. 정부와 산업계의 손발이 잘 맞으면서 상승 효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도쿄에 벤처캐피털 회사를 세운 제임스 라이니는 블룸버그에 “일본은 정책이 갑자기 뒤바뀌는 일이 없어서 외국인이 장기간 투자하기 좋다”며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중국에는 없지만 일본에는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기시다 내각은 소비 진작을 위해 가계 소득 증대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주식을 비롯한 개인의 자본 투자 수익에 과세를 최소화하는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를 강화하는 게 골자다. 일본 정부는 한시적으로 도입했던 이 제도를 영구화하고, 투자 한도를 높일 계획이다. 5년 내에 NISA 계좌 수를 3400만개, 투자 금액을 56조엔까지 각각 현재의 2배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고령화와 나랏빚 족쇄는 여전

일본 경제가 모처럼 활기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은 변수가 많다. 미·중 갈등으로 일본이 얻는 지정학적 이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불확실하다. 지난해 일본의 수출 상대국은 비율순으로 중국 및 홍콩(23.8%), 미국(18.7%), 한국(7.2%)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일본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가 중국이기 때문에 미·중 관계가 정말로 험악해지면 일본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

해외 투자은행(IB)들의 일본 증시에 대한 전망도 모두 장밋빛은 아니다. JP모건은 “올해 하반기에 글로벌 경제가 불황으로 접어들면 일본 증시도 상승세를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고,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앞으로 서서히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오르면 일본 증시의 상승세가 가라앉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일본은 고령화와 나랏빚이라는 두 가지 고질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1년 기준 일본의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28.9%로 미국(16.8%), 프랑스(20.9%), 독일(22.1%) 등에 비해 두드러지게 높다. 고령화는 노동 인력 부족을 부르고, 젊은 세대의 부양 부담을 키운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1990년에는 63%였지만 작년에는 263.9%까지 올랐다. 작년 말 기준 일본 정부의 국채 발행량은 1026조엔(약 9280조원)에 달한다. 금리가 오를 경우 막대한 이자 지급 부담에 시달려 재정에 심각한 압박이 가해질 수 있다.

그래픽=박상훈

그렇다고 해도 나랏빚으로 국운이 흔들릴 정도의 위기에 처할 가능성은 낮다는 반론도 많다. 일본은행이 전체 국채 발행량의 50.2%를 보유 중인 것을 비롯해 국채의 대부분을 일본 내 투자자들이 갖고 있어 글로벌 경제에 충격이 가해져도 타격을 적게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은 지난해 말 기준 대외순자산이 3조1655억달러(약 4070조원)로 세계에서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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