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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 로봇전’에서 손 모양의 로봇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로봇 팔 끝에는 사람 손과 비슷한 모양의 고무 소재 손이 달렸다. 30kg까지 집어 올릴 수 있는 이 로봇은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척척 집어냈다.

이 로봇이 화제를 모은 이유가 있다. 제작한 회사가 ICT 분야 기술 기업이 아니라 타이어 회사 브리지스톤이었기 때문이다. 종전의 로봇 팔은 진공으로 빨아들이는 방식이라 특정한 형태의 물건만 제대로 집어낼 수 있다. 반면 브리지스톤은 최대한 사람과 비슷하게 물건을 집을 수 있도록 고무로 된 인공 근육을 개발했다. 오랫동안 고무 소재 개발에 매진해온 노하우를 로봇으로 확장한 것이다. 타이어 회사가 왜 로봇을 개발했을까. 브리지스톤 관계자는 “인간의 손재주와 유연성을 갖춘 로봇을 개발해 미래의 인력 부족 문제에 대응해보겠다는 취지”라고 했다.

브리지스톤이 개발 중인 손 모양 로봇. 브리지스톤은 오랫동안 고무 소재를 다룬 노하우를 활용해 로봇이 크기가 다양한 물체를 유연하게 잡을 수 있도록 '고무 인공 근육'을 개발하고 있다. /브리지스톤

브리지스톤은 1931년 일본 후쿠오카현 구루메시에서 설립돼 92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의 미셰린, 미국의 굿이어와 함께 세계 3대 타이어 업체로 꼽힌다. 요즘 브리지스톤은 전통적인 타이어 사업을 뛰어넘어 로봇 제작 뿐만 아니라, 인류의 달 탐사를 위해 달의 극한 기온에 견딜 수 있는 타이어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한동안 혁신에 굼뜨다는 지적을 받은 일본 대기업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고 변화에 앞장선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최근 ‘불굴의 브리지스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브리지스톤의 시선은 타이어 판매 그 너머에 있다”고 했다.

◇로봇 제작과 달 탐사에 도전

브리지스톤은 지난해 9월 미 항공우주국(NASA)과 타이어 공급 계약을 맺었다. NASA가 달의 미개척 지역을 탐사하기 위해 자율주행 자동차를 제작하는데, 이 차량에 필요한 타이어를 브리지스톤이 공급하기로 한 것이다. 브리지스톤은 달의 극한 온도와 우주 방사선을 견디고 모래·암석 지대에서도 잘 달릴 수 있도록 금속 소재로 만드는 ‘비공압(airless)’ 타이어 개발에 들어갔다. 이시야마 마코토 브리지스톤 차세대 기술 담당 전무는 “브리지스톤은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데 더욱 매진하겠다”고 했다.

브리지스톤은 오래전부터 신개념 타이어 소재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작년 8월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펼쳐진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는 참가 차량에 장착된 타이어 한 쌍이 시선을 끌었다. ‘Fire Stone(브리지스톤의 미국 자회사)’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이 타이어는 ‘과율(guayule)’이라는 식물성 원료로 만들어졌다. 과율은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사막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브리지스톤은 2014년부터 과율에서 천연고무를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억달러(약 1280억원)가 넘는 돈을 투자해 과율 연구센터를 건립했고, 114만㎡(33만8000여 평) 크기의 과율 농장도 세웠다. 브리지스톤은 현재 스포츠카에 장착된 타이어 일부만 과율에서 얻는 고무로 제작하는데, 2030년까지 이 비율을 40%로 높이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브리지스톤 관계자는 “전 세계 천연고무 공급원을 다양화한다는 점에서 투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의균

◇타이어 업체에서 모빌리티 회사로

브리지스톤은 타이어 사업에서도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핵심은 ‘칩 타이어’라는 미래형 타이어다. ‘RFID(무선 주파수를 이용해 비접촉으로 정보를 읽는 장치)’를 내장한 타이어를 말한다. 칩 타이어에는 고유의 ID가 부여되는데, ID와 연결된 클라우드에는 타이어가 제작된 시기나 타이어 상태 등이 기록돼 있다. RFID를 통해 ID를 자동으로 읽어내면 타이어 마모 여부를 비롯해 타이어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브리지스톤 관계자는 “이 기술로 공기압을 빨리 파악해 적정 공기압으로 조정하면 연비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브리지스톤은 우선 미국과 유럽 지역 트럭과 버스에 칩 타이어를 장착하고, 2024년부터는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도 생산할 계획이다. 또 2030년까지는 미국, 일본, 유럽에서 장착되는 타이어 모두를 칩 타이어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타이어가 제때 수리되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량을 줄일 수 있는 까닭에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이미 일본의 오사카공항은 브리지스톤의 기술을 전수받아 항공기 타이어 교체 시기를 판단하고 있다.

브리지스톤은 칩 타이어 제작을 위해 오랜 기간 치밀하게 준비했다. 2015년 타이어 마모 정보를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2021년에는 GPS를 추적하고 운전자 행동을 관리하는 차량 관리 플랫폼 업체 ‘아즈가’를 인수했다. 자율주행에도 투자를 시작했다. 2021년 자율주행 트럭을 개발하는 ‘코디악 로보틱스’라는 업체에 투자했고, 지난해에는 자율주행 대중교통 서비스 등을 개발하는 ‘메이 모빌리티’의 지분을 사들였다. 브리지스톤 관계자는 “타이어만으로는 앞으로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모빌리티(이동 수단) 회사로 성장하려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숱한 악재 견뎌내

브리지스톤은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2000년 브리지스톤이 공급한 포드 차량의 타이어가 파열돼 270여 명이 사망해 비난이 빗발쳤다. 당시 타이어 파열 사태로 브리지스톤은 타이어 650만개를 리콜했고,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2000년 이후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한국과 중국 타이어 업체의 거센 도전을 받아 세계시장 점유율이 조금씩 하락했다. 2009년 출시한 전자종이(e-페이퍼)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 2012년 중단하는 아픔을 겪었고, 코로나가 덮친 2020년에는 69년 만에 적자(233억엔)를 기록했다.

위기 때마다 브리지스톤은 신기술을 내놓거나 경영 전략에 변화를 줬다. 업계에서 처음 개발한 ‘런플랫 기술(펑크가 나더라도 일정한 속도로 주행이 가능한 타이어)’을 활용해 타이어 판매량을 증가시키거나 재생 타이어 판매를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2020년 69년 만의 적자라는 위기도 금방 극복해 다음 해 곧바로 사상 최대 이익(3940억엔)을 냈다. 지난해에는 매출액이 처음으로 4조엔(약 36조원)을 넘어섰다. 닛케이비즈니스는 “브리지스톤이 ‘타이어 혁신’이라는 바람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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