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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MIT(매사추세츠공대) 슬론경영대학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경영의 신(神)’ 잭 웰치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이 초청 강연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방독면 쓴 남성이 나타나 웰치 회장을 향해 수류탄처럼 보이는 물건을 던졌다. 순식간에 혼비백산이었다.
당시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던 필리핀계 미국인 학생 매니 마세다는 본능적으로 연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경영 대가의 발치에 떨어진 게 진짜 수류탄이 아니라 모형 폭탄이라는 걸 확인했다. 이어 차분하게 가짜 수류탄을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가 깔끔하게 처리했다.
아수라장에서도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은 마세다를 웰치 회장은 식사에 초대했다. 배석자는 후일 GE 회장에 오른 제프리 이멀트 전략 책임자였다. 웰치와 이멀트는 나란히 “GE에 입사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마세다는 스카우트 제안을 물리치고 글로벌 컨설팅 회사 베인앤드컴퍼니(이하 베인)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우상이었던 웰치 회장의 손짓을 마다하고 컨설팅 회사를 선택한 이유는 “도전과 모험, 개척과 변화를 추구하는 성향이 잘 맞을 것 같아서”였다.
30년 가까이 지난 2018년 마세다는 베인 출범 이후 첫 아시아계 글로벌 회장으로 임명됐다. 세계 40국, 65개 사무소에서 직원 1만8500명을 둔 베인은 맥킨지,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함께 세계 3대 컨설팅 회사로 꼽힌다. 지금까지 글로벌 500대 기업의 64%가 고객으로 거쳐갔다.
올해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전환) 전략의 권위자로 인정받아온 마세다 회장이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본격적인 AI(인공지능) 혁명 시대를 맞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침반’을 찾고 싶어하는 기업과 CEO(최고 경영자)가 많기 때문이다. AI 폭풍이 몰고온 자욱한 안개를 뚫기 위한 기업의 ‘행동 강령’을 들어보기 위해 WEEKLY BIZ는 최근 서울을 방문한 마세다 회장을 만났다.
마세다 회장은 AI 시대를 맞은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을 크게 5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맨 먼저 “AI 대응은 속도가 관건(Speed matters)”이라며 “신기술을 수용하는 공격형(Play offense) 기업이 기회를 잡는다”고 강조했다. 두 번째로는 “AI는 임원이나 다른 전문가에게 맡기지 말고 CEO가 직접 이끌고 나가야 한다”고 했고, 세 번째로는 “단순 업무를 AI에 맡기고 창의성이 뛰어난 소프트파워 인재를 끌어들이라”고 했다.
마세다 회장은 네 번째로는 “AI로 당장의 수익이 없어도 5년 후를 내다보고 큰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했고, 마지막으로 “AI 패권 다툼이 시작되므로 CEO가 국제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고 했다.
◇CEO, 테크 모르면 생존 어렵다
마세다 회장은 34년 전 웰치 회장의 발밑에 떨어진 모형 수류탄을 처리할 때처럼 시계(視界)가 불투명한 AI 시대에 CEO가 갖춰야 할 자세를 차분하면서도 딱부러지게 이야기했다.
-AI 광풍이 산업 의제를 휩쓸고 있다.
“올해 초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열기를 확실히 느꼈다. 글로벌 기업 CEO를 70명쯤 만났는데, 온통 AI 얘기뿐이었다. 30년 넘게 컨설팅 업계에서 일했는데, 이 정도로 각광받는 신기술은 처음 본다. 빌 게이츠가 AI를 ‘1980년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 이후 일생 동안 혁명적이라는 인상을 받은 두 번째 신기술’이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만큼 획기적인가.
“그렇다. AI는 지난 10년간 등장한 기술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변화다. 현재 많은 글로벌 기업에서 AI 전략을 기술 임원에게 일임하지 않고 CEO가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 신기술을 파악하고, 원리를 이해하는 건 이제 리더의 필수 덕목이다. 사업 전략, 인재 모델, 법적 위험, 규제 대응까지 모두 따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CEO뿐이다.”
실제로 CEO의 ‘AI 발화’는 크게 늘고 있다. 지난 5월 미국 투자은행 라자드 CEO에 임명된 피터 오재그 전 백악관 예산실장은 176년 된 조직 문화를 AI 기술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더그 맥밀런 월마트 CEO도 지난 2분기 실적 발표에서 “AI 기술을 강화하는 것이 우리의 승리 전략”이라고 했다.
◇전사적 중앙조직 만들어라
그렇다면 AI 혁신은 어떻게 추진해야 할까. 마세다 회장은 “신기술을 적극 수용하고 무기로 삼는 ‘공격형(play offense) 기업’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며 “이미 많은 리더가 AI를 기업의 전략적 사안으로 규정하고 뛰어들었다”고 했다.
-신사업 대부분은 중간 단계에서 엎어진다. AI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이디어 단계에서 좌초되지 않으려면, 리더 역할이 중요하다. 지금은 생성형 AI 기술 성숙도가 낮고,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시기다. 그래서 전사적 중앙조직을 둬야 한다. 사업부별로 여러 조직을 만들어 산발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선 성과를 내기 어렵다. 특정 1~2개 주제를 압축해 심층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CEO 주변에는 누가 있어야 하나.
“중요한 건 CTO 같은 기술 임원뿐 아니라 고객을 상대하는 최전선 업무, 마케팅·정보관리 분야 최고 임원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AI를 기술 측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업무에 투입할 ‘조력자(enabler)’로 인식하는 실무형 리더가 필요하다.”
이미 많은 기업들이 AI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조직 개편을 서두르고 있다. 월스트리트부터 바쁘다. 현재 미국 6대 은행(BOA·시티그룹·골드만삭스·JP모건·모건스탠리·웰스파고) 모두 AI 전담 부서를 꾸렸다. 특히, JP모건은 지난 6월 은행 전체 AI 임원을 한곳에 모은 통합 데이터 분석 부서를 신설했다.
◇소프트파워 인재가 부상한다
AI 시대를 맞아 인력 시장에 격변이 예고된다. 뛰어난 인재상에 대한 기준이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직종별로 흥망성쇠가 교차할 것이라는 예견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이와 관련해 마세다 회장은 단계를 나눴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AI 기술 인력 수요가 폭증할 것”이라며 “지금 당장 머신러닝, 데이터과학·분석 전문가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다음 단계는 기술에 문외한인 이들에게 큰 기회가 찾아 올 것”이라며 “비(非)기술 인재가 AI의 힘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재 채용 기준도 바뀔 것 같다.
“베인을 예로 들면 50년 동안 인재상이 계속 바뀌었다. 과거에는 다재다능하고 스마트한 고학력 인재 중심이었다면, 지난 10년은 데이터 과학자 등 기술 인력을 많이 뽑았다. 앞으로는 AI가 대체할 수 없는 ‘소프트 스킬’을 갖춘 고숙련 근로자를 뽑는 게 중요할 것이다.”
-소프트 스킬?
“단순 반복 작업은 AI가 대신한다. 인간은 전략 기획, 창의성, 문제 해결, 리더십, 대인관계 업무에 집중하면 된다. 유연하고 섬세한 고차원 사고 활동에서 성과를 내는 인재가 각광받는다. 결국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기술이라기보다는 조력자(enabler)일 뿐이다. AI가 빠르게 진화할수록 단순 업무의 감가 상각도 빨라진다. 기획력·공감 성찰 능력 같이 정량화하기 어려운 소프트 스킬의 중요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화이트칼라 근로자에게 AI는 약일까, 독일까.
“과거 자동화 기술은 화이트칼라 사무직 일자리 수요를 감소시켰다. 생성형 AI는 중숙련 근로자와 저숙련 근로자 생산성을 크게 높여준다. 음성으로 명령하거나, 쳐다보기만 해도 단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면, 효율이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중숙련 근로자와 고숙련 근로자가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될 수도 있다. 전 세계 노동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필요성이 낮아진 일자리와 높아진 일자리 간 조정이 불가피하다.”
◇마케팅 혁명에 대비하라
현재 생성형 AI 기술은 난이도가 낮은 업무부터 적용되고 있다. 고객 상담 콜센터 업무가 대표적이다. 마세다 회장은 “1600만명이 콜센터 근로자인 필리핀에서 자랐기 때문에 콜센터에 관심이 많다”며 “AI로 고객은 10번 물어야 할 질문을 3번만 묻게 되고 수준 높은 상담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글로벌 가구 기업 이케아는 2년 전 AI 챗봇 ‘빌리(Billie)’를 도입했다. 빌리가 고객 문의 전화의 47%를 처리하게 되자, 이케아는 콜센터 직원 8500명을 재교육해 디자인 상담원으로 배치했다.
-소비자 입장에서 AI 상담원은 아직 불편하다.
“앞으로 고객이 5분 이상 전화기를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개선될 것이다. 흥미로운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프랑스 유통기업 카르푸는 오픈AI의 ‘챗GPT-4′를 이용해 단 6주 만에 쇼핑 보조 챗봇 ‘호플라’를 출시했다. 정해진 예산, 기피 음식, 파티 일정이 있다고 물어보면 참석 인원은 몇 명인지, 어떤 메뉴를 원하는지, 레시피와 식재료 리스트를 제공한다.”
-AI가 브랜드 마케팅에도 변화를 가져올까.
“사례는 계속 쏟아진다. 코카콜라도 AI 속도전에 빠르게 뛰어든 얼리어답터다. 지난 3월에 고객이 직접 콜라병을 디자인하는 마케팅 캠페인을 벌여 호응을 얻었다. 소비자 접점이 중요한 유통·통신 같은 B2C 기업은 AI로 고객 참여를 늘리고, 브랜드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
코카콜라는 지난 3월 오픈AI와 함께 ‘크리에이트 리얼 매직 캠페인’을 펼쳐 11일 만에 생성 AI 이미지 12만여 건을 접수받았다. 최근에는 AI에 소비자들이 꿈꾸는 ‘미래의 맛’을 물어, 해당 레시피로 북미 지역에서 한정판 콜라 ‘Y3000′을 출시했다. AI를 향한 관심을 재빨리 읽고, 마케팅으로 연결시킨 성공 사례다.
◇CEO는 5년 후 승리를 고민하라
마세다 회장은 필리핀 상원의장을 지낸 정치인 에르네스토 마세다(1935~2016)의 장남이며, 동생 에드워드(53)도 필리핀 현직 국회의원이다. 마세다 회장은 “기업 CEO도 주요국의 산업 정책과 국제 관계, 지정학적 변수를 이해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많은 국가가 AI를 전략 산업으로 지정하고 패권 다툼을 시작한 이상, 어느 때보다 CEO의 국제적인 정치·외교 감각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AI 기술, 정치적 고려도 해야 하나.
“많은 국가가 AI 기술을 선점하고, 기술 선도국이 되고 싶어한다. 영국은 AI 중심지로 부상하려는 야심을 품고 투자를 독려 중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달 미국 투자자와 기업이 특정 국가(중국)에 AI 투자 내역을 사전 신고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CEO는 이런 지정학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해외 시장에 진출할 때에도 AI 기술에 우호적인 산업 정책을 가진 정부를 파악해야 한다.”
-당장 뛰어들기엔 위험이 크지 않나.
“거듭 말하지만, 격변기에는 ‘속도가 관건’이다. 경쟁사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면 엄청난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업계 최초로 생성형 AI를 도입하려고 하는 CEO가 있는가 하면, 경쟁사를 지켜보며 관망하려는 CEO도 있다. 혁신의 모멘텀을 놓쳐선 안 된다.”
-불확실성의 시대, CEO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지금 우리는 전형적인 ‘미시 경제’ 사이클을 통과하고 있다. 중국, 인도, 러시아, 유럽, 미국의 경제 상황이 모두 다르다. 코로나 팬데믹에 금리 인상까지 ‘블랙 스완(예측과 대비가 어려운 위험)’과 ‘그레이 스완(예측 가능하나 뾰족한 대책이 없는 악재)’을 모두 겪었다. CEO는 내년이 아니라 앞으로 5년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고민해야 한다.”
-당장 내일, 한 달 뒤가 고민인데.
“글로벌 CEO와 대화하면서 느끼는 건, 당장 내년만 예측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방식은 결코 적절치 않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세계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오히려 탈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모두가 디지털 전환에 몰두하는 동안, AI라는 새로운 대세가 나타났다. 기후변화, 지속 가능성, 탈탄소화가 강조되다가 에너지 안보, 에너지 전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AI는 거대한 혁명이므로 당장 수익이 없어도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올해와 내년은 앞으로의 5년을 전망해보고, 전사 전략을 어떻게 조정할지 고민하기에 탁월한 시점이다. CEO들은 유연성, 회복 탄력성을 높여야 한다. 기술 강국이자, 고급 인력, 글로벌 기업을 보유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도 서구권과 아시아 양쪽 모두의 동맹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해왔다.”
인터뷰를 마친 뒤 마세다 회장이 농담을 건넸다. “이제 챗GPT한테 기사를 쓰라고 해보자. 살짝 편집하고 바이라인만 적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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