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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패션 트렌드로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올드 머니’ 룩이 떠오르면서, 관련 패션업체 실적이 일제히 고공행진하고 있다.
조용한 럭셔리는 대대로 재산(올드 머니)을 물려받은 상류층의 단정한 옷차림을 뜻하는 패션 용어다. 명품 로고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캐시미어·실크 같은 고급 소재를 쓰며, 간결하고 절제된 디자인이 특징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브리오니’ 양복이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로로 피아나’ 캐시미어 니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더 로우’ 가방이 대표적인 사례. 안감을 뒤집어 상표를 확인하거나, 직접 제품을 써보지 않았다면 브랜드를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패션업계에선 이런 올드 머니 명품 디자인을 차용한 상품이 쏟아지고 있는데, ‘땀 흘려 번 돈으로는 내 집 마련이 어려운’ 젊은 소비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명인 2세를 꼬집는 신조어 ‘네포 베이비’(nepotism+baby·족벌 자제)가 부정적 맥락으로 쓰이는 것과 달리, 조용한 럭셔리 열풍 이면에는 안정된 부(富)를 향한 동경과 인정이 투영돼 있다.
미국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상품 로고와 화려한 디자인을 공작새처럼 과시하는 ‘도파민 드레싱’이 유행했다”며 “올 들어 장기 침체로 인한 불안함이 정 반대의 유행을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세계 최대 명품 회사 LVMH의 장 자크 귀오니 CFO(최고재무책임자)는 “로고 없는 신중한 패션은 15년 전 세계금융위기 당시에도 큰 인기를 끈 바 있다”고 했다.
◇황금 구찌벨트 풀고 캐시미어 걸친다
조용한 럭셔리 열풍은 숫자로 드러난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올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0.5% 늘어난 5억4390만유로를 기록했다. 순 이익도 31.9% 늘어난 6670만유로에 달했다.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1000~6000달러짜리 캐시미어 스웨터로 유명한 브랜드다. 이 회사의 회장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조용한 럭셔리 열풍이 회사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며 “소비자 취향이 ‘노 로고(no logo)’로 향하면서, 우리가 그 과실을 맛보고 있다”고 했다.
최고급 원단, 군더더기 없는 재단으로 유명한 남성 명품 브랜드 ‘제냐’(옛 에르메네질도 제냐) 역시 인기가 치솟았다. 올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3.9% 증가한 9억300만유로, 영업이익은 43% 증가한 1억1700만유로를 기록했다. 올드 머니 패션의 대표주자 에르메스 또한 올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5% 늘어난 66억9800만유로, 영업이익은 28% 늘어난 29억4700만유로에 달했다.
반면 큼직한 로고, 유쾌한 디자인으로 2010년대 후반 유행을 선도한 구찌는 올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 줄어든 51억 유로를 기록하며 성장 엔진이 꺼진 상태다. 구찌는 ‘GG로고’와 알록달록한 색상, 괴짜 패션으로 밀레니얼 세대(1980년~1990년대 중반 출생)를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로 통했다. 국내 백화점 업계에 따르면 ‘시끄러운 럭셔리(loud luxury)’의 대표주자인 구찌와 발렌시아가의 올해 상반기 매출이 20% 이상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품 과시하던 중국인 취향도 바뀌어
흥미로운 건, 과시 문화로 유명한 중국인들의 명품 취향도 차분하게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중국 부자들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며 “1마일(1.6km) 떨어진 거리에서도 알아 볼 수 있는 화려한 로고가 사라졌고,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걸치던 구찌와 루이비통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2021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공동부유(같이 잘 살자)’를 정책 기조로 내세운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기 침체와 양극화로 국민 불만이 고조되고 있어 ‘비단 옷 과시 문화’가 차츰 잦아들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중국 SNS 챠오홍슈에서 ‘올드머니 스타일’ 해시태그(#)가 5300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며 “극심한 경제·사회적 분열 속에서 계급과 지위를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으로 부상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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