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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 루르슨 감독의 ‘레지스탕스 뱅커’(The Resistance Banker·2018)의 포스터.

2차 세계대전 영웅을 꼽으라면 흔히 군인과 정치가를 떠올리지만, 특이하게 금융으로 자유 진영의 승리에 기여한 인물이 있습니다. 요람 루르슨 감독의 ‘레지스탕스 뱅커’(The Resistance Banker·2018)는 나치가 점령한 암스테르담에서 비밀 은행을 설립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도운 금융인 발라벤 판 할(배우 배리 아츠만)의 활약을 재현한 영화입니다. 네덜란드 대표 영화상인 ‘황금 송아지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인기상을 비롯해 다섯 부문을 휩쓴 작품이죠.

1941년 영국에서 활동 중인 네덜란드 망명 정부는 은밀히 발라벤에게 접근해 레지스탕스 활동 자금을 조달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발라벤은 네덜란드 해군 장교 전역 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활동하다 암스테르담에 복귀한 금융인입니다. 명문가 출신으로 역시 은행가인 형 헤이스(야콥 데르비흐)와 함께 금융권에 인맥이 넓고 영향력이 컸습니다.

하지만 서슬 퍼런 나치 치하에서 공개적으로 ‘레지스탕스 은행’을 표방할 수는 없습니다. 형 헤이스와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은행 방식에 반대합니다. 발라벤은 생각이 다릅니다. 폭넓게 돈을 끌어올 수 있는 금융 방식을 활용해야 레지스탕스를 도울 만한 충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우리도 나치만큼 조직적이어야 하고, 나치보다 더 스마트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발라벤은 비밀 유지와 대규모 자금 조달이라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업의 전문성을 활용합니다. 우선 우호적인 은행가들에게 외관상 레지스탕스와 무관한 펀드에 대출하도록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네덜란드 정부가 상환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공개적으로는 합법적 펀드 투자 증서를 교부합니다. 망명 정부는 이 방식을 승인합니다. 이렇게 조달한 자금으로 비밀 은행은 레지스탕스에 무기를 공급합니다. 피신한 이들에게는 돈·식량·피난처를 제공하고, 인쇄소에 자금을 지원해 반나치 선전물을 제작하죠.

전쟁이 끝나고 망명정부가 암스테르담에 복귀하자 비밀 은행은 그간 조달해 레지스탕스 지원에 사용한 금액이 1억길더(옛 네덜란드 통화)라며 상환을 요청합니다. 정부는 승인 한도를 넘었다면서 실제로 레지스탕스 지원에 쓰였는지 증거를 요구합니다. 헤이스는 방대한 거래 기록을 제출하는데요. 회계 처리되지 않은 금액은 단 한 푼도 없었습니다. 결국 네덜란드 정부는 전액을 상환했습니다. 현재 가치로 5억유로(약 7000억원)에 상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레지스탕스 활동조차 금융업과 회계의 일반 원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네덜란드다운 역사입니다.

주인공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발라벤은 안타깝게도 연합군이 암스테르담을 수복하기 직전 나치에 체포돼 총살당했습니다. 이후 네덜란드, 미국, 이스라엘에서 훈장을 추서했습니다.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네덜란드중앙은행 앞에 서 있습니다. 형 헤이스는 정계에 진출해 상원의원과 암스테르담 시장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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