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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퍼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힙합 뮤지션 켄드릭 라마(37)는 이달 초 미국 ‘덤폰(Dumb phone)’ 제조업체 라이트와 손잡고 ‘라이트 폰 2′ 한정판을 출시했다. 덤폰은 통화·문자 메시지 정도로 최소한의 기능만 갖춘 일명 ‘바보폰’이다. 첨단 사양으로 무장한 스마트폰과는 달리 일부러 ‘구닥다리’ 사양을 고집하는 휴대전화다.

켄드릭의 299달러(약 40만원)짜리 덤폰은 출시 첫날에 내놓은 250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완판됐다. 켄드릭은 평소 “하루 대부분을 글 쓰고, 음악 듣고, 자전거 타며 덧없는 생각으로 보낸다”면서 “몇 달 동안 휴대전화 없이 지내기도 한다”고 했다. 퓰리처상 위원회가 켄드릭의 앨범에 대해 삶의 복잡성을 강렬한 글로 보여주는 언어적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평가했는데, 이런 예술성의 원천이 스마트폰을 멀리하며 생각을 깊게 하는 생활 습관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 Z세대를 중심으로 첨단 IT 기기 사용을 줄이는 ‘테크 디톡스(detox·해독)’ 바람이 불고 있다. 스마트폰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티(anti)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는가 하면, 소셜미디어로부터 멀어지자는 ‘소셜미디어 언플러그(unplug)’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첨단 기술을 온 몸으로 흡수한 세대가 이제는 디지털 해독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뉴욕 덤폰 스타트업 '라이트'의 전화기 사용 장면. /라이트 유튜브

◇테크 미니멀리즘에 눈뜬 Z세대

미국 일리노이대에 다니는 새미 팔라졸로(18)는 지난해 말 월마트에서 40달러짜리 AT&T 플립폰을 구입했다. 새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화면만 넘기는 아이폰의 노예가 되기 싫다”고 했다. 그가 틱톡에 남긴 플립폰 사용 후기는 1670만 조회 수를 올렸다.

뉴욕의 아이폰 사용자 오사마 카타나니(23)는 휴대전화가 두 대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스마트폰을 한쪽에 던져놓고 60달러에 구입한 알카텔 플립폰을 사용한다. 집에서는 업무용 이메일이나 인스타그램 메시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스마트폰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경우에 덤폰을 두 번째 휴대전화로 삼는 트렌드가 생겨났다”고 했다.

테크 디톡스가 유행하면서 고사 직전이던 피처폰 시장도 소멸하지 않고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13년 세계 휴대전화 출하량의 45%를 차지하던 피처폰이 지난해 16%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지만, 최근 수요가 늘며 감소세에 제동이 걸렸다”고 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미국의 올해 피처폰 판매량이 280만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노키아 브랜드를 인수해 피처폰을 만드는 핀란드 스타트업 HMD는 “올해 매출이 지난해보다 25~30% 정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도 피처폰 거래가 늘고 있다. 중고 거래 앱 번개장터의 올해 상반기 피처폰 검색은 전년 동기 대비 177% 늘었다.

그래픽=김의균

테크 디톡스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미니멀리즘을 반영해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만든 피처폰도 등장하고 있다. 스위스 덤폰 업체 펑크트는 영국 모노클 디자인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멋진 디자인의 피처폰으로 유명하다. 이 업체는 아날로그 알람시계, 유선 전화기도 함께 판매하며 테크 디톡스를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스마트폰을 계속 쓰더라도 사용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독일 테크 디톡스 앱 ‘미니멀리스트 폰’은 100만명이 내려 받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불필요한 앱을 화면에서 숨기거나 특정 앱 사용 시간이 길어지면 알람이 울리는 기능을 갖췄다. 기존 태블릿PC의 대체재로는 알람이 없고 눈이 피로하지 않은 ‘전자 종이(e잉크)’를 사용한 태블릿이 각광받고 있다. 노르웨이의 전자 종이 태블릿인 리마커블은 지난 5년간 100만대가 팔렸다.

◇집중력과 생산력 높인다

테크 디톡스 기기는 다양한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 태스킹이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덤폰 회사 라이트는 “산만함 없이 심층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생산성을 높이는 최적의 생산 도구가 덤폰”이라고 설명한다. 종이 태블릿 리마커블도 “우리 제품은 집중력과 사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고안된 장치”라며 “자신의 생각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글을 읽는 데 방해되는 기술과 소셜미디어 알림 기능을 없앴다”고 했다. 의도적으로 첨단 기기의 초연결성을 탈피했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이메일,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지 않으면서도 트렌드에 민감한 IT·금융·패션 분야에서 성공한 기업 CEO도 많다”고 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이 대표 사례다. 버핏 회장은 2010년부터 10년간 20달러짜리 삼성 폴더폰을 사용하다가, 2020년부터 팀 쿡 애플 CEO가 보내 준 ‘아이폰 11′을 쓰고 있다. 애플 지분의 5.6%를 보유한 그는 “증손주들이 아이폰을 끼고 사는 것을 보고 삶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깨달았다”며 “하지만 나는 아이폰 11을 오직 전화기 용도로만 쓴다”고 했다.

◇소셜미디어 떠나는 Z세대

‘디지털로부터의 탈출’ 트렌드는 소셜미디어 업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요즘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소셜미디어를 멀리하는 10대들의 정기 모임이 열린다. 테크 기기와 소셜미디어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는 ‘러다이트 클럽’ 회원들이다. 19세기 영국의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 운동’에서 이름을 착안했다. 이 청소년들은 매주 공원에서 만나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읽거나 수채화를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뉴욕타임스는 “러다이트 클럽 회원들은 대부분 폴더폰을 쓰며, 타인과 함께 있을 땐 전화기를 꺼내지 않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영국에서는 디지털 디톡스 단체인 ‘타임 투 로그오프’가 지난해부터 ‘6월 넷째 주 일요일’을 ‘언플러깅 데이(코드 뽑는 날)’로 정하고, 24시간 동안 디지털 기기와 소셜미디어를 멀리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글로벌 홍보 회사 덴쓰 이지스 네트워크가 2020년 22국 Z세대 5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1%는 소셜미디어 이용 시간을 줄였고, 17%는 소셜미디어 계정을 없앤 것으로 나타났다. 58%는 테크 기업의 데이터 활용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용자 데이터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자극적 콘텐츠를 제안하고, 테크기기 사용 시간을 늘려 광고 수익을 얻는 IT업계의 ‘감시 이익’에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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