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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미국 최대 석유 기업 엑손모빌이 다우존스를 구성하는 주요 30종목에서 퇴출당했다. 1928년 다우존스에 입성한 엑손모빌이 92년 만에 밀려나는 수모를 겪은 건 월가에서 일대 사건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2020년 엑손모빌은 224억달러라는 막대한 순손실로 깊은 상처를 입고 40년 만에 적자를 냈다. 게다가 이 무렵 행동주의 투자 기업 엔진1에서 ESG(환경·사회·지배 구조) 경영을 본격화하라는 거센 압력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이사 3명이 교체됐다.
‘석유 공룡’ 엑손모빌이 곤경에 처한 건 석유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왔다. 기후변화가 촉발한 전기차와 친환경 에너지 시대를 맞아 석유의 효용 가치가 본격적으로 낮아질 것이라는 예고와 맞물렸다.
그러나 팬데믹이 물러가고 경제 활동이 재개되자 3년 만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기름에 불이 붙듯 다시 석유 산업이 불타오르며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 엑손모빌은 2021년 순이익 230억달러로 바로 흑자 전환했고, 지난해에는 순이익 557억달러로 한 해 사이 배 이상으로 늘었다.
전 세계로 보더라도 지난해 석유 소비량은 39억1800만톤으로 2000년 (32억9700만톤) 대비 18.8%, 2010년(35억5800만톤) 대비 10.1% 증가하며 꾸준히 늘고 있다. 에너지 정보 업체 에너데이터 집계로 지난해 세계 에너지 소비를 에너지원별로 분류하면 석유(30%), 석탄(27%), 가스(23%), 전기(10%), 바이오 연료(10%) 순이었다.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대의 아래 신재생에너지와 전기차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지만, 실제로는 석유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얘기다. 석유가 여전히 탄탄한 입지를 유지하면서 ‘피크 오일(Peak Oil)’이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과장됐다는 반론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피크 오일은 석유 시장이 절정을 찍고 꺾이는 시점을 뜻하는 말이다.
WEEKLY BIZ는 피크 오일 논쟁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미래의 에너지 시장을 점쳐보기 위해 백악관에서 ‘원유 정책 브레인’으로 활동했던 에너지 전문가 로버트 맥널리 래피던에너지 대표를 화상으로 만났다. 32년간 에너지 정책 입안자이자 시장 분석가로 활동해 온 맥널리 대표는 2017년 저서 ‘석유의 종말은 없다(원제 Crude Volatility)’에서 160년에 걸친 유가 변동 역사를 추적했다. 그러고선 책 제목처럼 “석유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기차와 신재생에너지 투자 열풍에도 석유는 현대 문명의 생명선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맥널리 대표는 “우리가 하루아침에 다른 에너지원으로 갈아탈 수 없는 이상, 좋든 싫든 석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며 “에너지의 정치화를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환경주의자들의 눈치를 살피는 ‘정치적 판단’ 탓에 그릇된 결정을 하게 되면 에너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맥널리 대표는 이어 “현재 석유 시장은 ‘산기슭(foothills)’이라 부르는 호황의 시작 단계에 와 있다고 봐야 한다”며 환경 보호론자에게 도발로 들릴 수 있는 주장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전기차는 석유 패권 흔들지 못한다”
피크 오일 논쟁을 둘러싸고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석유 종말론자인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석유 수요는 2030년이 되기 전 정점을 찍고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하이탐 알가이스 석유수출국기구(OPEC) 사무총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 이데올로기가 석유 종말론을 주도한다”며 석유 불패론을 내세우고 있다.
석유 종말 논쟁은 말싸움을 넘어 숫자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OPEC이 이달 발표한 내년 석유 수요 증가분 전망치는 하루 225만배럴로, IEA가 전망하는 93만배럴과는 큰 차이가 있다. 132만배럴에 달하는 격차는 하루 평균 세계 석유 소비량(2022년 9960만배럴)의 1.3%에 달하는 양이다. 향후 석유 수요에 대해 IEA는 2028년부터 고꾸라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OPEC은 2045년까지는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전기차 시대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 석유 수요는 당연히 줄어드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석유는 수십 년간 가스, 석탄과 함께 세계 에너지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해 왔다. 지금도 농업, 산업, 국방에 중요한 동력 수단을 석유에 의지하고 있다. 전기차 보급이 공격적으로 이뤄지더라도 2033년까지 석유 수요는 하루 1억1000만배럴 수준으로 늘어날 것이다. 2030년 석유 수요가 꺾이고, 2050년이면 탄소 중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왜 비현실적인가.
“전기차 보급이 공격적이더라도 전체 운송 연료 증가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기 배터리는 항공기와 선박, 장거리·고중량 운송용 석유를 대체할 수도 없다. 근본적으로 화물 트럭, 선박, 항공기와 산업 생산에 필요한 석유 수요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전기차 보급으로 인한 석유 수요 감소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전기차 전환 속도가 더뎌지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가장 적극적이던 영국 정부도 2030년 예정됐던 내연기관 신차 판매 중단 조치를 2035년으로 연기하지 않았나. 최근에는 전기차 판매 성장세가 꺾이고 있다.”
현재 승용차 연료는 전체 석유 수요의 20~25%를 차지한다. 세계 전기차 누적 보급 대수는 전체 승용차(14억7400만대)의 1% 수준인 1400만대 수준이다. 전기차 규모가 10배로 늘어나면, 석유 수요 대체량은 하루 200만배럴로 예상된다. 이는 전체 수요의 2% 수준에 그친다.
게다가 맥널리 대표의 말대로 전 세계적으로 경제 성장에 따라 에너지 소비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세계 에너지 소비량은 145억8500만톤으로 2010년 대비 17% 증가했다. 작년 세계 에너지 소비량 가운데 아프리카 비율은 6%, 중남미는 5.8%에 불과했지만, 앞으로 이런 지역에서는 빠른 경제 성장과 비례해 에너지 수요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에너지는 진보·보수 문제 아니다”
맥널리 대표는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백악관의 원유 정책 브레인이었다. 9·11 테러, 이라크 전쟁, 캘리포니아 전력 위기, 엔론 부도 사태를 겪으며 에너지와 기후 대책을 지휘했다. 그는 “비상사태와 위기를 잇따라 거치며 국가 에너지 정책은 좌파와 우파, 민주당과 공화당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며 “에너지 안보는 진보·보수 문제가 아니라 똑똑함과 멍청함, 정상(sound)과 비정상(crazy) 문제”라고 했다.
-백악관에서 정치인들과 일하는 건 어땠나.
“에너지 정책은 2000년대 들어 유가 변동 폭이 극심해지고, 에너지 안보 중요성이 커지면서 우선순위가 높아졌다. 지정학 리스크가 잇따르고, 아시아 석유 수요가 급증했다. 에너지 정책의 복잡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도자가 미친듯이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닫지 않도록,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 현명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일이 중요해지는 시기였다.”
-요즘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환경은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나.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정보의 개방성이다. 예전에는 극비 보안 허가를 받아야만 접근할 수 있었던 정보를 이제는 온라인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위성 사진으로 탱크 높이를 측정해 규모를 파악할 수 있고, 제재 지역으로 향하는 석유 밀수 선박을 추적할 수 있다. 둘째로는 예측의 정치화다. 정보와 통계 자료가 정치적 입맛에 따라 뒤바뀌며 사실과 다른 전망이 유행하는 일이 크게 늘었다. 석유 수요가 곧 꺾인다고 주장하는 IEA가 대표 사례다.”
-석유 수요가 줄어든다는 예측이 틀렸다는 건가.
“IEA는 2018년까지만 해도 석유 수요가 2030년이면 1억2000만배럴에 달할 것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러자 환경 단체들이 ‘파리 기후 협약을 위협하고 세계 흐름에 역행한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IEA는 보고서가 정치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하자 돌연 태세를 바꿔 다른 예측을 내놓기 시작했다. 전망치를 변경하면서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수요 피크 시나리오는 사실에 기반한 분석이 아니라, 기대와 희망에 가까워 보인다.”
IEA가 석유 수요 전망치를 낮추는 것이 환경 단체들의 눈치를 보는 ‘정치적인 제스처’에 가깝다는 게 맥널리 대표의 주장이다. 그는 “에너지의 정치화를 멈춰야 한다”며 “최근 기후변화 대응, 전기차 전환 논의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급격하게 이뤄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시장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올가을 미국인 884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최근 전개되는 기후변화 방지 운동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는 응답자가 공화당 지지자 중에서는 78%, 민주당 지지자 중에서는 30%로 분명한 대비를 보였다.
◇왕성해진 ‘빅 오일’의 M&A
기후변화 주범으로 지목되며 내리막길을 걷던 석유 업계는 리오프닝을 계기로 부활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에너지 수요가 다시 치솟으면서 세계 6대 ‘빅 오일(엑손모빌·셰브론·에퀴노르·로열더치셸·토탈·BP)’의 순이익은 전년 대비 2.3배 급등한 2247억달러(약 293조원)를 기록했다.
초대형 인수·합병(M&A)도 잇따르고 있다. 엑손모빌은 지난달 11일 미국 셰일 시추·탐사 업체인 파이어니어 내추럴리소시스를 595억달러(약 81조원)에 사들였고, 그로부터 12일이 지나자 셰브론이 석유 개발 업체 헤스를 530억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피크 오일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형 생산 업체들이 수십 년간 활용할 시추 지점을 찾아 나섰다”며 “앞으로 수십억 달러 규모 빅딜이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빅 오일’ 기업들은 왜 왕성하게 빅딜에 나서나.
“석유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너지 업계가 장기적으로 석유 시장을 낙관하지 않는다면 인수 합병에 나설 수 있을까? 탈석유에 베팅했던 기업도 기후 대응 계획을 거둬들이고 있다. 로열더치셸은 친환경 저탄소 사업 수익성이 악화하자 구조 조정에 나섰고,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도 석유 감산 계획을 축소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활황에 따른 구조적인 유가 상승기가 온다고 봐야 할까.
“수급 격차로 인한 유가 상승이 예상된다. ‘산기슭’이라 부르는 유가 호황 국면의 시작 단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석유 감산과 공급 감축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지정학적 위험도 존재한다. 이처럼 수요와 공급 펀더멘털(기초 여건)은 석유 수퍼 사이클이 시작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유가 흐름을 살펴볼 때 가장 눈여겨봐야 할 변수는 무엇인가.
“당연히 석유 수요와 공급 펀더멘털이다. 석유는 가격이 출렁인다고 해서 당장 생산과 소비 플랜을 바꿀 수 없는 원자재다. 기름 값이 내렸다고 주차장에서 공회전하는 사람은 없다. 원유 시설은 투자에서 생산까지 11년 걸린다. 이처럼 가격 변동에 시차를 두고 반응하는 비탄력성 탓에 수급 불일치가 발생하고, 호·불황 사이클이 6~7년 주기로 반복된다. 이런 원리를 알아야 한다.”
◇”한국의 원유 비축 사업, 잘한 결정”
유가가 오르면 한국 경제는 큰 타격을 입는다. 지난해 현대경제연구원은 연평균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 이르면 우리나라 소비자물가는 1.1%포인트 상승하고, 경제성장률은 0.3%포인트 하락하며, 경상수지는 305억달러 감소한다고 추산했다.
-고유가는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무척 불리하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정부가 사우디, UAE와 원유 공동 비축 사업에 뛰어든 건 의심할 여지 없이 잘한 대응이다. 기술 강국인 한국은 핵융합 에너지 같은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중동과 교류를 이어가면서 안정적인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볼 땐 석유 카르텔이 달갑지 않다.
“석유 시장의 진실은 산유국보다 소비국이 어려운 처지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유가가 극심하게 흔들리는 시기에는 경제가 혼란에 빠진다. 소비자는 전기차와 픽업트럭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고, 항공사는 50년 동안 쓸 비행기 기종 선택을 망설이게 된다. 투자 결정도 어렵고, 통화·재정 정책 설계도 복잡해진다.”
세계 에너지 시장의 합종연횡은 현재진행형이다. 맥널리 대표는 “사우디가 이끄는 OPEC, 러시아가 이끄는 OPEC+, 셰일 혁명을 일으킨 미국이 에너지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어 유가 방정식이 훨씬 복잡해졌다”고 했다. 현재 글로벌 에너지 산업을 둘러싼 핵심 의제가 석유의 종말로 넘어가지 않았고, 여전히 에너지 패권 다툼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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