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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는 엄청나게 크다. 또 대부분 국내 생산이 가능하다. 무역이 필요하지만, 다른 나라보다는 훨씬 덜 필요하다. 이 나라의 리더십은 지난 몇십년 동안 미국인들을 좌절시킨 무역 정책을 추진해 형편없는 결과를 낳았고,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잘못된 길을 가던 항공모함의 방향을 틀었다.”
11월 미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조 바이든 대통령,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간 ‘리턴매치’가 확정된 가운데 다음 정부의 통상 정책을 가늠할 교과서로 통하는 책이 있다. 트럼프 정부에서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Lighthizer·77)가 지난해 6월 펴낸 ‘공짜 무역은 없다(No Trade is Free)’다. 트럼프의 ‘경제 스승’이라 불리는 라이트하이저는 트럼프 2기 정부가 들어설 경우 10% 보편적 관세, 대(對)중국 60% 관세같이 트럼프가 툭툭 던진 투박한 아이디어들을 실제 정책으로 만들어 낼 인물로 꼽힌다. 트럼프는 이 책을 대량 구매해 선거 캠프에 돌렸고, 민주당 의원들조차 주변에 한번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고 한다.
라이트하이저는 이 책에서 문재인 정부 초기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 과정,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 적자 등에 대해 가감 없이 서술하고 있어 우리 입장에선 트럼프 2기가 열릴 경우 한국과의 무역·통상 정책을 가늠해 볼 좋은 참고서이기도 하다. 라이트하이저는 “한국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라며 “1960년대 경제 규모가 40억달러에 불과했던 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지금은 캐나다 수준이 됐는데 이것은 꽤 놀라운 성취”라고 했다.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비평은 여기까지다. 그는 동맹국 한국에 대해 싸늘한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라이트하이저는 “우리는 한국의 방위비로 수십억달러를 분담하는데, 한국은 미국에 대한 수출 장벽을 유지하고 엄청난 흑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트럼프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했다.
라이트하이저는 한미 FTA에 대해서도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다. 2012년 3월 발효된 이 협정을 두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 캠페인 때 허점이 많다며 이를 비판했지만 정작 집권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FTA 이후) 한국은 미국 차를 아주 적게 추가 수입한 반면, 미국에 대한 수출은 획기적으로 늘렸다”고 했다. 2017년 7월부터 14개월이 걸린 재협상 과정을 놓고도 “한국 측이 무역 불균형에 대한 미국의 우려는 중요하지 않다고 단언해 우리 팀이 거의 협상장을 나가버릴 뻔했다” “트럼프가 관세 부과 같은 추가적 레버리지로 압박하고 나서야 한국 측이 진정성 있게 협상 테이블에 나와 논의에 속도가 붙었다”고 했다. 이어 “FTA 재협상으로 한국과의 무역에 있어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며 “시간을 끌었더라도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팀이 일찌감치 협상을 마무리 지은 건 똑똑한 일”이라고 했다.
이 같은 인식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유럽 등 미국의 우방국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우리와 가까운 동맹과 파트너 국가들이 미국을 불공정하게 대우했고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는 게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라이트하이저는 “미국에 대한 최혜국대우(MFN)는 거부하면서 우리 시장에는 자유롭게 접근하는 건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더 이상 안 된다”고 했다. 이어 “지난 30년간 외국에 180조달러를 퍼준 미국이 이제는 무역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며 무역법 301조(교역 상대국의 불공정 행위로 미국 무역에 제약이 생기는 경우 보복할 수 있도록 허용) 같은 ‘정책 무기’들을 구애받지 않고 사용할 것을 주문한다. 라이트하이저는 “경제적 효율성, 낮은 가격, 기업의 이익 모두 중요하지만, 일반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문제에 비하면 부차적”이라며 “미국이 더 이상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 노릇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라이트하이저는 보수 정부가 집권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대(對)중국 무역 정책을 손보는 것을 꼽는다. 그는 “중국과의 정상 무역 관계(PTNR)를 폐기하고, 미·중 경제의 전략적 디커플링(decoupling·공급망 등 분리)을 추구해야 한다”며 “WTO(국제무역기구) 체제에 의존하기보다 일방적으로 행동하거나 생각이 같은 나라들끼리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수입 관련 법규를 바꿔 외국 수출업자에 노동·환경 분야 요건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수입할 때 똑같은 양의 미국 상품이 수출됐음을 증명하라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반도체 같은 전략·첨단 산업에 대해선 “미국이 반도체를 개발해 놓고도 위기에 처해 있다”며 “수조달러 보조금을 받는 중국, 유럽, 한국, 일본 회사와 경쟁해 살아남을 수 없다. 특정 분야에선 보조금이 필요하다”고 했다.
라이트하이저는 바이든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에 대해 “좋은 출발이고 바이든 역시 트럼프와 내가 그린 정책을 따라갔다”며 “중국, 나아가 무역에 관한 우리 시각이 이제 이 나라의 주류가 됐다”고 했다. 11월 대선에서 바이든·트럼프 둘 중 누가 승리하든 이른바 ‘아메리카 퍼스트’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 무역 정책의 방향성이 당분간 바뀔 일은 없을 것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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