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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줄을 바짝 죄어도 위축되지 않는 미국 경제 ‘미스터리’는 전시(戰時) 수준으로 불어난 ‘빚’ 때문이란 진단이 나오고 있다. 경제 전문 매체 블룸버그는 최근 “미국 의회예산처(CBO)가 2025년이면 미국 정부의 국채 이자 비용이 2차 세계 대전 당시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의 국채 이자 비용이 2025년에는 국내총생산(GDP)의 3.2% 수준까지 상승해 1940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까지 오를 전망이란 것이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도 “선출된 공직자들이 연방 정부 재정이 지속가능한 경로로 복귀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눠야 할 때”라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지금껏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력 덕분에 국가 채무 부담이 비교적 작다고 생각됐다. 달러를 찍어내 빚을 갚아내면 된다는 믿음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부채가 위험 수위에 오르자, 지난해 8월 글로벌 신용 평가사 피치가 미국 정부의 신용 등급을 강등했고, 같은 해 11월엔 무디스가 신용 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그래픽=김하경

‘무소불위 달러’에 의구심이 샘솟는 가운데 세계적 경제 석학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 교수는 WEEKLY BIZ와 화상으로 만나 “(아무리 미국 정부라도) 과도한 지출이 계속되면 금융시장에서 부정적 반응이 올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미국 국채가 여전히 최고의 안전 자산이라고 여겨지지만, 상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투자자들에게 외면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라잔 교수는 2003년 40세에 최연소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에 오른 세계 최고 수준 경제학자 중 하나로 꼽힌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에 앞서 2005년 잭슨 홀 회의에서 “현재 금융 발전이 대규모 금융 위기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해 ‘금융 위기의 예언자’란 강렬한 수식어를 얻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킹달러’ 흔드나

올해는 ‘수퍼 선거의 해’다. 전 세계 76국에서 세계 인구 절반 이상인 유권자 42억명이 투표권을 행사한다. 표를 얻기 위해 돈을 퍼주는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 정책이 쏟아지기 쉬운 시기란 뜻이다. 지난해 8월 세계적 석학들의 글을 공유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포퓰리스트가 유리한 점(The Populist Advantage)’이라는 글을 쓰기도 한 라잔 교수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당장 원하는 만큼 돈을 써도 내일은 저절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포퓰리즘적 사고에 빠져 있다”고 경고했다.

그래픽=김하경

-미국에서도 정치인들이 재정 건전성을 경시하는 경향이 뚜렷한 것 같다.

“최근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기꺼이 지출을 늘리는 모습이다. 미국처럼 (경제 규모가) 큰 나라에선 단기간 지출이 늘어도 시스템이 금세 망가지지 않고 오래 굴러간다. 그러나 문제가 터졌을 때 수습하려고 하면 너무 심각해진 상황이라 극복이 어려울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국가 채무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많지만, 포퓰리즘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더 ‘주류’ 자리를 꿰차고 있다. 건전한 거시 경제 정책이 지금 현재는 물론,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공감대를 다시 이룰 필요가 있다.”

실제로 선진국 중 예산 마구 퍼주기에 브레이크를 건 나라가 있다. 지난해 11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 헌법에 못 박아둔 ‘국가 부채 제동 장치’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독일 정부 예산안 무효 결정을 내렸다. 독일의 국가 부채 제동 장치는 정부로 하여금 GDP의 0.35%까지만 새로 빚을 낼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게 골자다. 라잔 교수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매우 잘한 일”이라 평했다. 그는 “선진국들도 (코로나 사태로 늘어난) 국가 채무를 점검해 봐야 할 때가 됐다”며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라며 재정 건전성 규정에 예외를 두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할 또 다른 영역이 있다면.

“무역 정책에서도 경계해야 한다. 글로벌 무역과 관련해서도 자유무역의 이점은 쉽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보호무역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는 쉽다. 미국 내 일부 정치 세력은 ‘국가 안보’ ‘기업 안보’ ‘일자리 안보’라는 세 측면을 이유로 보호 무역 필요성을 주장한다. 예컨대 ‘한국의 공장에서 일하는 저 사람이 당신 일자리를 강탈하고 있다’는 주장은 (대중에게) 쉽게 먹힌다. 당장 관세를 부과하면 누군가의 일자리를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에서 저렴한 재료를 못 구하면, 생산 비용이 올라 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궁극적으로는 미국 내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이런 설명은) 대중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픽=김하경

◇”확장 재정은 인플레에 기름 붓는 격”

지난해 IMF도 미국의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의 엇박자에 대해 우려 목소리를 냈다. 재정 정책은 정부가 돈을 써서 재화 수요를 직접적으로 만들어 내는 정책이고, 통화 정책은 자본 사용료인 금리를 조정해 간접적으로 경제를 움직이는 정책이다. 그런데 미국에선 이 정책이 서로 반대로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니얼 리 IMF 경제 전망 담당 총괄 수석은 지난해 WEEKLY BIZ 인터뷰에서 “(미국이) 물가를 잡기 위해 매우 긴축적인 통화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장적 재정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월가에서도 “고물가가 지속되는 건 연준이 아닌 정부 탓”이라는 비난이 나오는 상황이다.

-미국의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 방향성이 엇갈리는데 괜찮을까.

“결코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 제약적인 통화 정책(고금리 정책)이 경기 과열을 막아 내고 있는데, 확장적인 재정 정책은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붓는 형세다. (확장적 재정 정책 때문에) 지난해 미국 재정 적자가 GDP의 6%를 넘어섰다는 집계도 봤는데 이를 정상적이라고 볼 순 없다. 원래대로라면 금리가 너무 많이 오르지 않도록 (정부가) 일정 수준의 경기 둔화를 용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기 과열과 타이트한 노동시장으로 임금이 가파르게 상승한다면 인플레이션 불길이 잘 잡히지 않을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어지면 연준은 금리를 인하하기 어렵다. 연준이 똑같은 일(급격한 금리 인상)을 두 번씩이나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라잔 교수는 2013년부터 3년간 인도 중앙은행을 이끌며 물가 관리에 탁월한 성과를 낸 이력이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 세계 투자자들은 인도 물가를 안정시키고, 거시 경제 안정성과 은행 시스템을 개선한 라잔 총재를 ‘영웅’에 가까운 존재로 여긴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그는 전임자들과 달리 연임에 실패했다. 2014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취임한 이후 여당인 인도국민당(BJP) 소속 강성 정치인들이 라잔 총재 비판 수위를 높였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여당 의원들은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빠르게 내려주길 원했지만, 라잔 총재는 물가 관리에 방점을 둬 고금리를 유지하는 바람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해석도 나온다.

-연준의 인플레이션 대응은 늦었다고 보나.

“미국의 2021년 통화 정책은 문제였다고 본다. 막대한 정부 지출이 이어지고 있는데 중앙은행은 금리 정상화를 꺼렸다. 연준은 인플레이션이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길 바랐다. 물가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 이전 10년 정도의 경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적극적인 금리 인상을 통해) 인플레이션에 강력히 대응하지 않길 원했다. 이번 인플레이션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고 본다. 다만 연준이 조금 더 일찍 대응에 나섰다면 그 파급력을 줄일 수는 있었을 것이다. 연준 내부에서 인플레이션의 초기 징후를 발견하는 즉시 적극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일종의 프레임워크가 작동했다면 적기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래픽=김하경

-금리를 더 올려야 하지는 않았을까.

“연 1.5~2%대인 ‘실질 금리(시중 금리와 물가 상승률의 차이)’는 경제성장을 둔화시키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과거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이 한 것처럼 금리를 더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금리를 더 올렸다가는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 같은) 금융 부문의 실패를 부를 위험이 큰 것도 사실이다. 만기가 긴 자산을 많이 보유한 은행들은 금리가 오르면 자본이 감소하며 취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제는 시간에 맡겨두고 (현재 금리 수준을 유지하면서) 기다려야 할 때다.”

◇인도는 ‘지식 산업’으로 승부

신흥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인도가 중국을 대체할 ‘세계의 공장’이 될 수 있을까. 그간 중국은 저렴한 인건비를 기반으로 싼 물건을 찍어내는 거대한 공장 역할을 했다. 그러나 1인당 GDP가 1만달러를 넘어서며, 중국의 젊은 층 역시 거친 일을 꺼리기 시작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진다. 더구나 인도는 지난해 중국을 뛰어 넘어 전 세계 1위 인구 대국으로 올라서며 ‘세계의 공장’ 역할을 중국에서 넘겨받을 것이란 주장이 부상했다. 그러나 라잔 교수가 조국 인도를 바라보는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지난해 말 내놓은 ‘거푸집 깨기(Breaking the Mould)’라는 책에서 “인도는 동아시아의 기적적 성장 방식을 모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저부가가치 제조업에서 오로지 가격 경쟁력에 성패를 거는 방식으로는 인도 경제를 부양하기 어렵다고 봤다.

-동아시아의 성공 방식을 인도에 적용하기 어려운 이유는.

“1960년엔 한국과 중국, 인도의 1인당 GDP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우리는 한국과 중국의 놀라운 성장을 지켜봤다. (동아시아 국가 사이에서) 1980년대 초반 제조업 성장이 시작됐을 때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 국민의 교육 수준은 비교적 높았지만, 인도 근로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또한 중국은 임금 통제와 금리 제한, 안정적 환율 유지와 인프라 산업 지원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반면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는 과거 중국처럼 근로자 권익을 억누르고 국가가 산업 정책을 완벽히 통제하기 어렵다. (산업 정책을 통제하는 대신) 인도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도는 저임금·저숙련 노동이 투입되는 섬유, 전자제품 조립 같은 산업보다는 제약 같은 고부가가치 제조업에 장점을 보이고 있다.”

인도는 교육 수준 양극화가 심한 나라로 꼽힌다. 인도는 독립 이후 자와할랄 네루 총리 시절부터 고등교육에 무게를 둬 우주산업 등에서 최고 과학기술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 인도공과대학(IIT)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대학이기도 하다. 반면 인도 국민의 문자 해독률은 70%대에 머무는 데다, 초·중등교육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양질 제조업 근로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라잔 교수는 대학 교육을 통해 수많은 엘리트 엔지니어를 길러낸 인도가, 자국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도가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최근 주목받는 반도체 산업을 예로 들자면, ‘파운드리(위탁 제조)’가 아닌 ‘팹리스(설계)’에 집중해야 한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이 연구 시설을 인도에 두고 있고, 전 세계 반도체 설계 인력의 20%가량이 인도 출신이다. 인도가 굳이 반도체를 생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인도 정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인도 엔지니어 50만명이 국내외 팹리스 기업에 근무하며 매년 3만개가 넘는 반도체를 설계한다.) 생산은 대만이나 한국, 미국이 맡으면 된다. 인도는 훌륭한 엔지니어가 많지만 반도체 설계 분야 등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맡기 위해 더 많은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대학 교육에 더 집중하고, 학생들의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인도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있는 개발도상국)’가 서구권 국가를 추격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을 통해 제조·수출 위주 경제보다는 서비스 중심 경제로 성장하는 것이 기후변화 대응처럼 세계적인 과제 해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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