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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땅, 뜨거운 햇빛이 작열하는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서쪽 사막엔 400만개의 태양광 패널이 물결치듯 다닥다닥 붙어 장관을 이룬다. 세계 최대 단일 부지 태양광 발전소인 ‘알 다프라(Al Dhafra)’다. 지난해 말 처음 가동을 시작한 이 발전소는 발전 용량만 2기가와트(GW)에 달해, 연간 240만t의 탄소 배출 감축에 기여한다. 도로에서 차량 50만대를 없애는 것과 맞먹는 효과다. UAE는 앞서 2019년에도 1.2GW급의 태양광 발전소인 ‘누르(Noor·빛) 아부다비’를 가동하기 시작했는데, 4년 만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태양광 시설을 또 증설한 것이다. 재생에너지에 눈독을 들이는 건 UAE뿐만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이른바 ‘검은 황금’ 석유 부자들이 지천인 석유를 놔두고 태양과 바람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국제에너지지구(IEA)에 따르면, 중동 지역의 태양광·풍력 전력 생산 용량은 2021년 7GW에서 2030년 54GW에 달할 전망이다. 전 세계 태양광·풍력 전력 생산 용량 증가세보다 8배 빠른 속도다.
‘산유 부국(富國)’들이 환골탈태하고 있다. WEEKLY BIZ가 국내외 중동지역 전문가 5명을 통해 격변의 중동을 진단해봤다.
◇석기 시대는 돌이 없어서 끝난 게 아니다
산유 부국들이 ‘넥스트 오일(석유 다음의 먹거리)’을 찾아나서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설을 주도한 아메드 자키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전 석유장관은 이미 2000년에 ‘석유의 종말’을 경고했다. 그는 “석기 시대는 세상에 돌이 없어 끝난 것이 아니다. 석유 시대도 오일이 고갈되기 전에 끝날 것이다”고 했다.
이런 중동의 고심은 이제 재생 에너지 발전이란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오일 머니’로 돈을 번 중동 각국이 탈탄소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따라가는 것을 넘어 태양광, 풍력 등을 바탕으로 에너지원을 다변화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사우디는 2030년까지 자국 전력 비율의 50%를 재생에너지로, 나머지 50%를 천연가스로 충당한다는 내용의 ‘비전 2030′을 추진한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2021년 10월 사우디 그린 이니셔티브 포럼에서 “206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UAE와 카타르도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각각 25%, 20%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중동 국가들이 이처럼 신재생에너지에 집중하는 까닭 중 하나는 ‘석유 종말’이란 위기감도 있지만, 그만큼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광활한 사막, 풍부한 일조량 등과 같은 조건이 재생 에너지 산업엔 찰떡궁합이란 뜻이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동·북아프리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재생 에너지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동·북아프리카는 태양광 발전 효율의 주요 지표인 수평면 전일사량이 1일 5.8kWh/㎡로 주요 대륙 가운데 가장 높은 데다, 태양광의 계절별 편차가 적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사우디 북부, 쿠웨이트 서부 등은 연평균 풍속이 7.5m/s 이상이라 풍력 발전에도 적지란 평가다.
사이먼 윌리엄스 HSBC 투자은행 중동법인 경제 수석은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자국총회(COP28)에서 국제 사회가 화석 연료를 줄여야 한다는 첫 명시적 합의문이 도출됐다는 사실은 중동 국가들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다”며 “중동은 자국의 경제 다각화를 위해서라도 재생 에너지의 주요 생산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는 “중동 각국의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 산업 구조 변화에 대한 지도부의 야심이 비(非)석유 기반의 경제 구조 성공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판 피라미드, 네옴시티
중동의 경제 다각화는 재생에너지에만 있지 않다.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네옴시티가 진짜 실현되면 피라미드 이래 역사적 대건축(大建築)이 될 것이란 평이 나온다. 미래형 신도시 사업인 ‘네옴시티’는 새로움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 ‘네오(NEO)’와 아랍어로 미래라는 의미의 ‘무스타크발(Mustaqbal)’을 조합했다. 새로운 미래를 그리겠다는 사우디의 포부가 담겨 있는 이름처럼 이 도시 자체가 첨단 산업의 집합체다.
이 프로젝트 가운데 길이 170km에 달하는 직선 도시 ‘더라인(The Line)’은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해수를 담수화해 식수를 공급한다. 인근에는 산악 관광·레저 도시 ‘트로제나(Trojena)’, 최첨단 산업도시 ‘옥사곤(Oxagon)’ 등이 지어지면, 말 그대로 주거·레저·일 등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완전체 도시’가 되는 셈이다.
사우디뿐 아니다. 이집트는 650만명을 입주시킬 목적으로 신(新)행정수도를 짓고 있고, 카타르, 오만 등 중동 국가들도 태양광 발전 단지를 짓는 등 ‘건설붐’이 한창이다. 윌리엄스 수석은 “세계적으로 네옴시티가 주목받고 있지만, 네옴시티는 현재 진행 중이거나 계획 단계에 있는 사우디의 총 3조3000억달러 규모 인프라 투자의 일부분일 뿐”이라며 “인프라 투자는 중동 지역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중동 건설붐’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광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아프리카중동팀 전문연구원은 “에너지 전환, 첨단산업 육성, 관광 산업 개발 등 현재 중동 국가들이 주력하고 있는 영역은 모두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필수적”이라며 “특히 중동 각국의 개발 계획이 2045~2050년 등까지 중장기적으로 잡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동 지역의 건설붐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자금 빨아들이는 중동
중동의 변화를 감지한 글로벌 자금도 이 ‘기회의 땅’에 쏠리고 있다. 최근 블룸버그가 공개한 컨설팅 기업 커니의 ‘2024년 외국인직접투자(FDI) 신뢰도 지수’에 따르면, 투자처로서 UAE와 사우디의 신뢰도는 올해 각각 글로벌 8위와 14위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가장 큰 상승세를 보인 것이다. 개발도상국 시장 중 UAE와 사우디 등에 대해 가장 낙관적인 평가를 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메란 캄라바 카타르 조지타운대 교수는 “중동에는 걸프협력회의(GCC) 국가 외에도 이란, 이집트, 알제리 등 거대한 내수 시장을 가진 국가들이 있다”며 “사우디 외에도 오만·바레인 등이 재생에너지를, 카타르는 디지털 산업과 같은 지식 집약 산업에 집중하는 등 중동에선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고 했다.
하얀 백사장, 쪽빛 바다와 같은 관광 자원도 중동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사우디와 카타르 반도 사이 작은 섬 바레인은 ‘중동의 해방구’로 통한다.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서구 문화에 관대한 편이고 돼지고기와 술을 즐길 곳도 있는 데다, 아름다운 해변과 대규모 쇼핑몰까지 갖춰 중동 지역 주요 관광지로 꼽힌다. 아부다비엔 도시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해변과 새하얀 모스크 등이 관광객에 손짓한다. 윌리엄스 경제 수석은 “지난해 중동 지역 역내 관광 수입과 외국인직접투자(FDI)는 기록적인 수준을 보이는 등 견조한 경제 흐름을 보이고 있다”면서 “중동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글로벌 고소득 지역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경제 성장세를 보이는 동시에 대규모 경제 구조 개편까지 시도하고 있어 잠재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역내 갈등’은 중동의 족쇄
다만 중동 경제의 장밋빛 미래는 중동 지역 내 갈등 탓에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나 후티 반군과 같은 역내 갈등의 불씨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이스라엘군은 시리아 주재 이란 영사관을 공격해 총 13명을 숨지게 하는 등 역내 긴장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CNN은 지난 5일 “미국이 이란의 보복성 공격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적극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11월부터 홍해 일대를 장악한 후티 반군 탓에 국제 선박들은 멀리 아프리카 희망봉 남단을 우회하는 상황도 이어지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후티 반군의 수장 압둘 말리크 알후티는 4일 TV 연설에서 “홍해에서 90척의 배를 공격했고, 한 달 동안에만 125발의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중동 지역 내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므르 함자위 카네기 국제평화연소 중동프로그램 담당은 “역내 갈등은 중동 국가들의 경제 성장을 끌어내리는 족쇄”라고 했다. 함자위 담당은 하마스, 후티와 같은 독립 세력들의 활동이 중동 지역에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국가와 정부의 구속을 받지 않고 ‘지역 주권(regional sovereignty)’을 행사하는 독립 세력들은 지역 경제의 뇌관과 같다”며 “후티 반군의 활동 때문에 이집트는 수에즈운하를 통한 수입이 급감했고, 중동은 글로벌 물류 허브로서의 지위가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고 설명했다.
캄라바 교수는 “중동 지역엔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형제단과 세속주의 집단 등 여러 세력이 갈등 관계에 있다”며 “이들은 종교·종파 때문에 다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대립하는 ‘전략적 경쟁’의 측면이 강하다”고 했다. 그는 “만약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종식되지 않고 사우디·UAE 등 산유국으로 더 번진다면 전 세계 경제까지 휘청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국제 유가에도 직격탄이 되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최근 ‘2024년 3월 단기 에너지 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해 2분기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88달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월 전망보다 4달러나 오른 셈이다. 산유국 협의체 OPEC 플러스(OPEC+)가 올해 1분기까지 실시하기로 했던 하루 200만 배럴 원유 감산 조치를 오는 6월까지 연장한 데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각종 분쟁이 이어지면서 국제 유가가 계속 고공행진을 이어갈 것이란 이다.
◇중동, ‘기회의 땅’을 잡아라
변화의 물결과 갈등의 불씨가 남아 뒤섞인 중동. 위험은 있지만, 탈(脫)석유, 경제 다각화로 변신하는 ‘기회의 땅’에 국내 기업도 적극 뛰어드는 양상이다. 재생에너지, 건설 등 각종 분야 특수(特需)를 공략하려는 것이다. 한국서부발전은 지난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UAE의 대규모 태양광발전소 사업 계약을 따냈다. 1조원 이상이 투입되는 발전용량 1.5GW 규모 ‘아즈반 태양광 발전소’의 건설 및 운영을 맡게 된 것이다. 서부발전은 향후 30년 동안 이곳에서 생산된 전력의 구매까지 보장받게 됐다. 문학성 서부발전 해외사업실 차장은 “사우디, UAE 등 중동 산유국들은 국가 신용 등급이 높고, 정부가 전력 구매 계약 내용과 기간을 보증해주기 때문에 세계 주요 기업들이 눈독 들이고 있다”면서 “중동 지역은 그린 수소·암모니아 등과 같은 신재생에너지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있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기회의 땅’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건설 시장에도 기회의 바람이 불고 있다. 국내 건설업계는 부동산 내수 시장이 침체된 가운데 중동 지역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새로운 돌파구로 삼는 분위기다. 삼성E&A(구 삼성엔지니어링)와 GS건설은 사우디에서 72억달러(약 9조7000억원) 규모 해외 플랜트 수주에 성공했다. 우리 기업의 사우디 수주 역사상 가장 큰 규모다. 한국의 전 세계 해외건설 수주 사업을 규모별로 따져봐도, UAE의 바라카 원전(2009년, 191억달러),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2012년, 77억달러)에 이어 셋째로 크다.
유광호 전문연구원은 “중동은 태양광, 원전, 플랜트, 방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 잠재력이 큰 지역”이라며 “중동은 한 번 계약한 국가, 업체와 계속 거래를 하는 지역적 특징이 있어, 최근 한국과의 계약 성공은 앞으로 중동과의 거래 포문을 열었다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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