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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영석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로펌 변호사로 일하는 한 여성은 파트너 변호사란 출세 사다리를 타기 위해 아침이면 어김없이 사무실로 출근한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집과 무려 640㎞ 떨어진 스타트업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애당초 재택근무를 전제로 고용돼 가능한 일이다.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는 또 다른 미국 여성은 테크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산다. 남편은 집에서, 본인은 직장에서 맞벌이를 하는 것이다. 기혼 여성들이 ‘바깥일’을 하는 동안 남편들은 재택근무로 ‘안사람’이 되는 새로운 풍토가 늘고 있다고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가 소개했다.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이른바 잘나가는 미국 가정 가운데 여성들은 밖으로 출근하고, 남성은 재택하는 ‘원격 남편(remote husband)’이 많아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픽=김의균

◇늘어나는 전문직 여성들

아내가 밖으로 출근하고 남편은 재택근무를 하는 트렌드가 퍼지는 주된 원인은 변호사,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특히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전미법률직업협회(NALP)는 올 1월 “지난해 미국에서 로펌을 다니는 여성 변호사 수가 사상 처음으로 남성 변호사 수를 앞질렀다”고 밝혔다. NALP는 1991년부터 관련 데이터를 집계해왔는데, 당시 38%에 머물던 여성 비율은 지난해 50.3%까지 올라왔다. 미국 로스쿨에 등록한 여성 수도 2015년에 남성을 처음 추월했고, 그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의료계도 상황은 비슷하다. 미국 의과대학협회(AAMC)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의사 중 여성의 비율은 2007년 28%에서 2021년 37%로 늘어났다. 전문직 여성 확대는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OECD 회원국들의 여성 의사 비율은 2019년 49%에 달했다. OECD는 “지난 20년 동안 모든 OECD 국가에서 여성 의사 비율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고학력·고소득 전문직으로 점점 더 많이 진출하고 있다는 얘기다.

◇재택근무가 수월한 남성 고소득자들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이 대면 업무가 필수적인 전문직으로 대거 진출하는 사이, 남성들은 정보기술(IT), 테크 분야에서 우위를 보였다. 각종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하고, 인공지능(AI) 서비스가 고도화되는 등 첨단산업들이 생겨나면서 남초 직장인 IT·테크 분야로 일터를 잡는 남성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 IT·테크 분야는 근무 형태가 유연한 데다,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를 이어가는 곳이 많다는 게 특징이다. 집에서 일하는 남성들이 덩달아 늘어난 이유다. 결국 고학력·고소득 맞벌이 부부 중에서 남성들이 재택근무에 더 적합한 직장을 갖게 된 경우가 늘어난 것이다.

딜로이트가 미국 상위 20대 테크 기업을 분석(2021~2022년 기준)한 결과에 따르면, 테크 기업에서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3대1 정도로 벌어진다. 전체 일자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2.9%인데, 테크 기업에서의 여성 비율은 25% 정도로 남성 비율이 높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는 미국 직장인 약 1만4000명을 대상으로 2022년 설문한 결과 “젊고, 학력과 소득 수준이 높은 남성일수록 원격 근무가 수월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고학력·고소득 남성들 중에 풀타임 재택근무가 가능한 비율은 38%에 이른 반면, 같은 조건의 여성들은 30%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국내서도 생겨난 ‘원격 남편’

‘원격 남편’은 미국 등 일부 서구권 국가만의 현상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원격 남편이 느는 추세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이모(45)씨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의 등·하교, 숙제 감독 등 육아를 책임지고 있다. 스타트업에서 웹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재택근무를 하며, 대기업에 다니는 아내의 빈자리를 채운다. 이씨는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가 이어지면서 육아는 물론 청소, 빨래 등 대부분 집안일을 맡게 됐다”며 “최근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택근무’가 이직의 필수 조건이 됐다”고 했다.

실제로 젊은 부부들 사이에선 재택근무가 기업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2022년 국내 성인 남녀 4534명에게 설문을 진행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3.1%는 중요한 기업 선택 기준으로 ‘재택근무 포함’을 선택했다. ‘재택근무 포함’을 선택한 응답자들 다섯 중 하나(21.2%)는 “아이 등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있어서 재택근무가 필요하다”고 그 이유를 답했다.

육아 부담도 남녀가 나눠서 지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변하면서 한국 남성들의 재택근무 요구도 커지고, 육아휴직 남성도 빠른 증가세다. 지난해 남성 육아휴직 신청자는 5만4240명을 기록해 처음으로 5만명을 넘겼고,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 휴직자의 비율도 지난 2016년 8.5%, 2018년 16.3%, 2020년 22.6% 등으로 늘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녀를 불문하고 근무 형태가 유연한 쪽이 육아를 더 많이 하는 건 성평등, 여성 경력 단절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면서 “다만 재택근무는 원칙적으로 육아를 위한 복지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집에서 일하는 것’과 ‘집안일’ 사이 명확한 구분과 개념 정립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원격 남편(remote husband)

집에서 원격으로 일하는 남편. 근무 형태가 유연한 정보기술(IT)·테크 분야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많아지면서 선진국의 맞벌이 부부 가운데 아내가 사무실로 출근하고, 남편은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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