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6096
16만명 대(對) 300만명. 서울의 강남역과 도쿄 시부야역의 하루 이용객 수다. 강남역은 2호선과 신분당선만 있는 반면, 시부야는 9개 노선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두 지역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긴 TV에서 일본 뉴스를 전할 때마다 배경 화면으로 등장하는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떠올리면 거의 20배에 가까운 차이가 어느 정도 실감은 간다.
시부야에 가면 ‘100년 만에 한 번, 시부야 대개조’란 캐치 프레이즈가 자주 눈에 띈다.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상징한다. 2012년 시부야의 34층 복합 건물인 ‘히카리에’가 완공된 이래 9개의 고층 빌딩을 지었으니 ‘대개조’는 틀림없다. 그런데 100년 만에 한 번이란다. 도대체 100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울 강남이 1960년대 말까지 전기조차 없었던 한적한 지역이었던 것처럼 시부야도 19세기 말까지는 시골이었다. 1885년 JR 야마노테선 시부야역이 생겼지만 그냥 역일 뿐이었다. 개통 초기의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34명이었다는 통계에서 보듯,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업가로 꼽히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 부근에 전원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도시 기능은 살리되, 시골의 푸르름까지 최대한 살아있는 지역을 꿈꿨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있는 파리의 도로를 그리면서, 1918년 ‘전원도시 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3년 분양을 시작했다. 같은 해 발생한 관동대지진이 새 집에 대한 수요를 부추기면서 분양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곳은 지금도 고급 주택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아무리 동네가 쾌적하더라도 접근성이 부족하면 의미가 없다. 훗날 ‘도큐 그룹’을 일군 고토 게이타는 이 점에 착안, 전원도시가 있는 덴엔조푸역과 시부야역을 잇는 철도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시부야역에서 전철로 12분이면 덴엔조푸역에 도착한다. 그래서 ‘전원도시의 탄생은 시부사와의 발상력과 고토 실행력의 합작품’이라고 표현한다.
고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34년 시부야역에 백화점을 오픈했다. 철도회사가 백화점을 운영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당시 백화점은 미쓰코시, 이세탄, 마쓰자카야 등 포목점이 주도하던 업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기회는 어디에든 있었다. 고토의 스승이자 ‘한큐 그룹’을 일군 고바야시 이치조는 더 많은 손님을 전철에 태우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역 위에 백화점을 짓는 비즈니스 모델을 떠올렸다. 1920년 자기가 운영하던 역 2층에 도쿄의 한 백화점을 입점시켰다. 수요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고 사업의 성공을 확신한 그는 1929년 새로운 터미널을 준공하면서 한큐 백화점을 탄생시켰다. 이런 스승의 모습을 보고 5년 뒤 고토는 시부야역에 백화점을 연 것이다.
일본에는 200개가 넘는 철도 회사가 있는데 도큐, 한큐처럼 대형 회사는 16개가 있다. 도큐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세이부(西武) 철도였다. 그 또한 고토의 모델을 답습, 유통업을 확장시켰다. 그래서 도큐 그룹과 세이부 그룹은 서로 으르렁거리는 견원지간이었다. 세월이 흘러 창업자가 모두 사망한 뒤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들은 화해했다. 도큐 그룹은 이케부쿠로가 본거지인 세이부 그룹의 시부야 진출을 환영했다. 도큐 브랜드 일색인 시부야에 세이부 백화점은 그렇게 탄생했다.
도큐든 세이부든 대부분의 백화점은 30대 이상을 겨냥했다. 그런데 세이부는 20대를 타깃으로 한 ‘시부야 파르코’를 만들어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도큐는 ‘시부야 109′를 만들어 10대를 겨냥했다. 점점 시부야는 젊은이의 거리로 변모했다. 전원도시를 만들겠다는 한 사람의 꿈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새로운 경쟁, 새로운 타깃을 거쳐 오늘날의 시부야를 만들었다. 향후 서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지 궁금해진다.
WEEKLY BIZ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6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