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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렸을 때 배고픔은 ‘악마’와 같다. 배고픔은 뇌의 가장 오래되고 원시적인 부분에서 깨어나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다른 신경 메커니즘을 동원해 명령을 수행한다.”
세계적 신경학자인 브래드퍼드 로웰 하버드대 메디컬스쿨 교수는 테크 매거진 MIT(매사추세츠공대) 테크놀로지 리뷰에서 배고픔을 ‘악마’라 칭한다. 그런데 만약 이 무서운 배고픔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리모컨이 있다면 어떨까.
이 배고픔 조절 리모컨 역할을 해주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이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약물은 혈당 수치를 조절하고 음식이 위를 떠나는 속도를 늦추며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GLP-1)을 모방해서 살을 빼게 해주는 비만 치료제다. 원래는 당뇨병 치료제로 나왔지만, 체중 감량이란 깜짝 효과를 보여 최근엔 되레 비만 치료제로 더 각광받는다. 이뿐만 아니다. 이 치료제는 인간의 욕망까지 다스리는 ‘마법의 리모컨’ 역할을 하며 21세기판 만병통치약에 등극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2030년 관련 시장 규모는 144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WEEKLY BIZ는 이 치료제의 3대 개척자로 통하는 미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조엘 해버너 교수, 캐나다 토론토대 대니얼 드러커 교수, 덴마크 코펜하겐대 옌스 홀스트 교수를 포함한 과학자 15명을 인터뷰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럽의약품청(EMA), 비만 치료제 시장을 양분하는 노보노디스크와 일라이릴리,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2곳에도 비만 치료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배고픔 알람을 음소거하라
비만은 인류 건강의 최대 적이다. WHO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8명 중 1명이 비만이다. WHO는 2022년 기준 전 세계 비만 인구가 10억5000만명(성인 8억9000만명·미성년자 1억6000만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 비만 치료제 시장을 이끄는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는 “비만은 평균수명 단축과 삶의 질 하락을 가져오며, 수많은 질환을 불러오는 ‘관문 질환(gateway disease)’”이라고 했다.
만약 과체중·비만인 사람들에게 적절한 조치가 없다면 2035년 기준 세계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4조달러(약 5600조원)에 이를 것이란 게 이 제약사 예측이다. 비만 치료제 시장을 양분하는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의 케빈 림 북아시아태평양허브 의학부 부사장은 “비만과 과체중의 영향으로 연간 280만명 정도의 성인이 사망한다”고 했다.
이 같은 비만 문제에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은 게임 체인저로 등판했다. GLP-1은 장이 음식을 소화시키는 과정에 분비하는 아주 강력한 인슐린 분비 자극 호르몬이다. 체내에서 금방 분해되는 성질의 GLP-1을 천천히 분해되도록 개량한 게 ‘GLP-1 유사체’였다. 해버너 교수는 “인슐린은 직접 투약할 경우 자칫 저혈당증 부작용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며 “이에 체내 인슐린 분비를 촉진하는 약물이 더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약을 처방받다 보니 배고픔을 잘 못 느끼고 살이 쭉쭉 빠지는 의외의 효과가 나타나 비만 치료제로 유명해진 것이다. 드러커 교수는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은 안정적인 혈당 조절, 전례 없는 체중 감량 효과와 함께 심장·신장 질환의 예방 효과까지 갖춰 ‘인류 건강의 큰 진보’라 부를 만하다”라고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발견
‘기적의 비만약’은 한 사람의 힘으로 태동한 것은 아니다. 생물의학 분야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게어드너 국제상을 2021년 공동 수상한 해버너 교수, 드러커 교수, 홀스트 교수가 3대 개척자로 꼽힌다. 하버드 메디컬스쿨에 따르면, 우선 홀스트 교수는 1970년대 이미 장 수술을 받은 환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다 어떤 ‘특정한 물질’이 인슐린 분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비슷한 시기 해버너 교수는 아귀 췌장 세포 연구에서 이 ‘특정한 물질’에 대한 힌트를 얻은 뒤, 추가 포유류 연구에서 이 물질이 GLP-1이란 호르몬이란 점을 알아낸다.
그러나 이 물질은 약물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GLP-1의 체내 반감기(물질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가 2분 정도로 짧았기 때문이다. 이때 드러커 교수는 미국 남서부 지역에 사는, 힐라강의 괴물이란 뜻을 지닌 독도마뱀 ‘힐라 몬스터(Gila Monster)’를 주목한다. 이 도마뱀은 봄에 3~4번 정도만 먹이를 먹고 영양분을 꼬리에 저장한 뒤 1년을 버티는 특이한 습성을 지녔다. 이를 가능하게 한 건 독도마뱀 타액에 포함된 ‘엑센딘-4′라는 호르몬 덕분이었다. 드러커 교수는 이에 GLP-1과 비슷한 효과를 내지만 반감기도 30분으로 긴 엑센딘-4로 당뇨병 치료 약물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고, 엑센딘-4를 활용해 만든 당뇨병 치료제 ‘엑세나타이드’가 2005년 4월 미국에서 승인받기에 이른다. 비만 치료제로 가는 첫 관문도 열리게 된 셈이다.
◇인간의 욕망을 다스려라
당뇨약으로 처음 활용된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은 이제 비만약을 넘어 ‘중독 치료’란 부수 효과로도 조명받고 있다. 비만 치료제는 쾌감·즐거움과 관련한 도파민 분비를 제어해 식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알코올이나 담배의 주요 성분인 니코틴, 마약에 대한 욕망까지 억누르는 효과까지 기대해 볼 만하다는 얘기다.
미국 국립보건원(NIH) 산하 약물중독연구소의 노라 볼코 소장은 “최근 (비만 치료제의 핵심 물질인) GLP-1 유사체가 뇌에서 도파민 분비를 제어하고, 스트레스·기억력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다”며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은 범용 중독 치료제로도 잠재력이 있다”고 했다. 특히 술 생각을 사라지게 하는 연구가 많이 진행됐다. 엘리사베트 홀름 스웨덴 예테보리대 교수는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을 투약했을 때 술 섭취량이 줄어들 뿐 아니라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까지 줄인 것으로 조사됐다”며 “알코올중독으로 치료받는 사람들이 다시 술을 찾게 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안데르스 핑크옌센 코펜하겐대 교수는 “MRI(자기 공명 영상 진단) 촬영을 통해 분석한 결과, 알코올 사용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을 투약하면 술과 관련된 이미지를 보여줘도 뇌의 보상 중추(reward center)가 덜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담배나 대마초 흡연 욕구를 줄여주는 부분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핑크옌센 교수는 “동물 실험에서는 니코틴에 대한 욕구를 줄여준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금연 이후 체중이 불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은 (담배를 끊은 뒤에도) 살이 찌지 않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중독성 높은 마약을 끊는 데도 효과가 있다는 연구가 이어진다.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선 코카인을 투여했을 때 도파민이 분비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혀진 것이다. 스콧 카노스키 서던캘리포니아대(USC) 교수는 “동물 실험에서는 (마약류인) 암페타민과 오피오이드에 대한 욕망을 제어해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술과 담배, 마약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욕망’을 다스리는 치료 약물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켄트 베리지 미시간대 교수는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을 쓰면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를 감소시키지는 않고, 알코올이나 니코틴에 대한 지나친 욕구를 적절히 억눌러 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만병통치약이란 꿈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은 이제 치매와의 전쟁에까지 참전하며 ‘21세기 만병통치약’ 후보로 조명받는다. WHO에 따르면, 전 세계 치매 환자는 5500만명이 넘는다. 치매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2019년 기준 1조3000억달러로 추산됐다. 이반 코이체프 옥스퍼드대 선임연구원은 “당뇨병 치료를 위해 GLP-1 유사체 기반 약품을 투약했던 사람들은 알츠하이머 발병 확률이 30% 정도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파킨슨병 치료 효과도 주목받고 있다. 파킨슨병은 신경세포가 퇴화해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 줄면서 생기는 병이다. 올리비에 라스콜 프랑스 툴루즈대 병원 교수는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인 ‘릭시세나타이드’를 투약한 파킨슨병 환자는 투약 중단 두 달 후에도 도파민 분비가 증가한 것을 확인했다”며 “투약할 때만 일시적으로 도파민 분비를 돕는 게 아니라 신경세포 퇴화를 막아 증상 진행을 늦춰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 예방 효과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로드리고 만수르 토론토대 교수는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은 혈당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을 막는 동시에 뇌의 신경세포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고 있다”며 “이 같은 원리로 우울증 같은 기분 장애나 인지 기능 장애까지 예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이 약물은 난임 치료에까지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선 이미 비만 치료제인 오젬픽을 투약하던 사람이 임신에 성공하면서 ‘오젬픽 베이비’란 말까지 쓰인다. 로버트 노먼 호주 애들레이드대 교수는 “비만은 여성의 배란을 방해하고, 난자의 질 저하·자궁내막 상태 악화 등을 초래한다”며 “체중 감량은 임신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인다”고 했다. 카린 하마버그 호주 모내시대 선임연구원은 “비만은 정자의 질도 저하시킨다”며 “비만 치료는 남녀 모두의 생식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고 했다.
◇비싼 가격이 흠
이 비만 치료제의 인기는 광풍(狂風) 수준이다. 공급 부족이 이어지자 지난 20일 WHO는 ‘가짜 비만 치료제’에 대한 경고까지 내놨을 정도다. 모건스탠리는 글로벌 비만 치료제 시장이 2030년에는 최대 1440억달러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비싼 가격 때문에 약품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불만이 나온다. 노보노디스크의 비만 치료제 위고비는 미국에서 4주분이 1300~1600달러(약 180만~200만원)다. 만약 국내에도 미국과 비슷한 가격으로 출시되고, 건강보험이나 실손 보험 적용이 안 될 경우 한 달 약값만 200만원에 이를 전망이다.
일주일에 한 번만 접종하면 되는 위고비 같은 치료제들은 글로벌 공급 부족 여파로 국내에선 아직 구하려야 구할 수도 없고, 출시 시기도 미정이다. 노보노디스크의 오젬픽(당뇨병 치료제)과 위고비(비만 치료제), 일라이릴리의 마운자로(당뇨병) 등은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승인까지 받아뒀지만, 아직 국내에 공급이 안 된다. 일라이릴리는 비만에 초점을 맞춘 약품도 국내에서 허가를 받을 계획이다.
위고비는 현재 미국 등 총 8국에서만 판매된다. 이 약품들은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 의약품이라 해외에서 직구로 구입해서도 안 된다. 다만 매일 투약해야 하는 노보노디스크의 삭센다는 현재 국내에서 처방이 가능한 상태다.
◇식음료, 주류·담배 시장까지 여파
비만 치료제의 인기가 치솟으며, 전 세계 식음료 시장과 주류·담배 시장 지형까지 흔들릴 전망이다. 모건스탠리는 지난 4월 보고서에서 “비만 치료제 처방이 늘면서 2035년에는 전체 미국인의 칼로리 섭취량이 현재 대비 1~2%가량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아이스크림, 케이크, 쿠키, 사탕, 초콜릿, 냉동 피자, 과자, 탄산음료의 소비는 4~5% 정도 줄 것이란 게 모건스탠리 예상이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유로모니터의 칼 쿼시 연구원(간편식·영양 관련 리서치 총괄)은 “올해 진행된 유로모니터의 최신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5.8% 정도만 비만 치료제를 처방받아 투약해 본 것으로 나타났기에 앞으로 투약자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시장조사 기관 글로벌데이터의 닐 사운더스 연구원(유통업 담당)은 “이미 담배 산업은 죽어가고 있었는데, 비만 치료제의 중독 치료 효과가 입증된다면 관련 산업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건강식 수요는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세계적인 식품 기업 네슬레는 지난 5월 비만 치료제를 처방받은 사람들을 겨냥한 간편식 브랜드 ‘바이털 퍼수트(Vital Pursuit)’를 올해 4분기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단백질과 섬유질, 비타민 A와 칼슘이 많이 함유된 간편식으로 다이어트족을 공략하겠다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비만약의 효과가 아무리 좋아도 약에만 의존하지 말고, 삶의 방식을 건강하게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라고 당부한다. 건강식이나 운동 관련 산업이 함께 더욱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WHO는 “의학적인 치료가 비만 관리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인식돼선 안 된다”고 했다. EMA 역시 “GLP-1 유사체 기반 약물의 사용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스스로 칼로리 섭취를 줄이고 운동량을 늘리는 등 삶의 변화가 동반돼야 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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