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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높이의 100층짜리 아파트를 짓는다고 가정한다. 주민들의 편리하고 빠른 이동을 위해 초고속 엘리베이터가 필요하다. 건물 기둥은 100층 건물의 무게를 지탱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1층이나 100층이나 똑같은 수압으로 수돗물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으면 곤란하다. ‘깨끗한 물’은 고층 아파트에 살 때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이를 위해서 물탱크도 필요하고 수압을 조정해 줄 펌프도 필요하다. 파이프도 충분히 굵어야 한다.
반도체 칼럼에 왜 수돗물 이야기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이런 비유를 든 것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설계 원리도 똑같기 때문이다. AI 반도체의 경우 물 대신 고른 전압의 깨끗한 전류를 공급해야 안전하게 AI 기능을 구동할 수 있다. 고층 아파트의 수돗물처럼, 품질 좋은 전력이 얼마나 잘 공급되는지가 AI 반도체의 성능을 좌우한다. AI 반도체 사이의 성능 우열이 전력 공급망에서 결정된다.
GPU(그래픽 처리 장치)로 대표되는 AI 반도체는 학습이나 생성 작업을 수행할 때 1초에 수십억 번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디지털 계산을 한다. 이때 트랜지스터(반도체에서 전기 흐름을 조절하는 부품) 수백억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1′또는 ‘0′인 상태로 변화한다. 이는 디지털 회로의 특징이다. 이러한 변환 때마다 트랜지스터에 전자(電子)를 공급하거나 빼 줘야 한다. 전자를 공급하면 ‘1′이 되고 전자를 빼주면 ‘0′이 된다. 이를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반도체가 작동한다. 전자의 흐름이 전류고, 이 전류가 끊임없이 일정하게 공급되어야 AI 반도체가 제대로 작동한다. 고층 건물에 수돗물이 공급되는 원리와 같다. 특히 초거대 AI가 생성 작업을 하려면 공급해야 하는 전류가 급속도로 늘어난다. AI 반도체에 이러한 전류를 공급하는 회로를 ‘전력 공급망(PDN·Power Delivery Network)’이라고 부른다. 전력 공급망이 불충분하거나 원활하지 못하면 AI 반도체는 정상적으로 동작하지 못한다.
지난달 12일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문 미주 총괄 사옥에서 열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기업) 포럼 2024′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선 최시영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 사장은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파운드리·메모리·후공정을 한 번에 제공할 수 있는 반도체 업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특히 고성능 AI 반도체 제조를 위한 고도화 기술 중 하나로 2027년까지 ‘후면 전력 공급망(BSPDN·Back Side PDN)’ 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2나노(㎚·1㎚는 10억분의 1m, 반도체 성능은 수치가 낮을수록 좋음) 공정 ‘SF2Z’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차세대 AI 반도체 분야에서 전력 공급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판화 작업과 비슷하다. 보통 반도체 웨이퍼 앞면에 디지털 회로를 그려 넣고 트랜지스터와 이들을 연결하는 신호 배선을 설계한다. 트랜지스터와 연결된 전력 공급망은 금속 배선의 넓이가 크게 넓어야 하고, 금속 배선의 두께도 두꺼워야 한다. 그래야 저항이 작고 전압 강하도 일어나지 않는다. 수돗물 파이프가 굵고 녹이 나지 않아야 하는 원리와 같다. 그래서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저항이 크면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 더 높은 전압을 공급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AI 반도체의 전력 소모가 증가한다. 효율성이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앞면 공간이 꽉 차서 더 이상 회로를 그리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제 웨이퍼의 뒷면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면의 트랜지스터에 전류를 공급하기 위해서 실리콘을 관통하는 구멍(power via)을 뚫는다. 마치 지하수 파기와 같다. 이러한 ‘후면 전력 공급망’을 뜻하는 BSPDN을 개발하고 있다고 삼성전자가 지난 12일 발표한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쟁자는 대만의 TSMC와 미국의 인텔이다. BSPDN을 포함한 파운드리 서비스 기술 경쟁은 이렇게 계속된다. GPU·HBM을 비롯한 AI 반도체엔 깨끗하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이 필수적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 ‘전력 진실성(power integrity)’이라고 부른다. AI 시대, 반도체 혁신은 쉴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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