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류업체 갭(GAP)의 소니아 싱걸 최고경영자(CEO)는 “고객의 구매 트렌드를 너무 일찍 예단했다”며 지난 11일(현지 시각) 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갭은 1분기 회계연도(2~4월)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3% 하락하는 바람에 1억6200만달러 순손실을 냈다. 수요 예측을 제대로 못해 판매량이 줄고 재고가 급증한 게 주원인이었다. 지난 4월 말 기준 이 회사 재고는 지난해에 비해 34% 급증했다. 갭은 그동안 ‘집콕’ 수요에 맞춰 편안한 일상복에 주력했는데, 소비자들이 출근을 위한 복장을 찾기 시작하면서 고스란히 재고로 남은 것이다. 아베크롬비앤피치, 아메리칸이글아웃피터스도 비슷한 이유로 1년 전보다 재고가 각각 45%, 46% 늘었다.
코로나 엔데믹(풍토병화)과 함께 가전제품, 홈웨어(집에서 입는 평상복) 등의 소비가 줄면서 기업들이 쌓이는 재고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5월 기준 미국의 기업 재고는 전년 대비 17.7% 증가했다. 글로벌 공급난을 우려해 미리 주문해 놓은 물량이 많은데, 막상 물건이 매장에 도착하자 팔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DSCC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2분기 재고회전일수(재고가 팔리기까지 걸리는 시간)는 평균 94일로 예년 대비 2주 정도 더 길어져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세계 최대 전자제품 판매점 체인 베스트바이 역시 1분기 기준 재고회전일수가 74일로 예년(60일)보다 크게 늘었다.
월마트와 타깃, 콜스 같은 대형 유통업체 창고에도 재고가 쌓여 있다. 컨설팅업체 스트래트직 리소스그룹의 버트 플리킨저 매니징 디렉터는 CBS방송 인터뷰에서 “상품은 넘치는데 쇼핑객은 너무 적다”며 “업체들이 재고를 해결하기 위해 가전제품, 스포츠용품, 의류를 중심으로 큰 폭의 할인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상품이 매장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땡처리’ 업체로 직행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오하이오주의 재고 판매 업체 홈바이스는 최근 유명 브랜드의 세탁기와 건조기를 정가에서 40% 할인된 가격에 팔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이전엔 가전제품 재고가 거의 없어 팔 수가 없었지만 현재는 재고가 넘친다”고 했다. 테네시주의 재고 판매 업체인 바겐 헌트는 최근 한 대형 소매업체와 크리스마스 재고 상품을 놓고 가격 협상을 벌이고 있다. 엑세스 리미티드는 대형 온라인 소매업체로부터 의류와 러닝머신, 비디오게임 콘솔을 포함한 대량의 재고 상품을 인수했다. 우리나라도 상황이 비슷하다. 재고 전문몰 리씽크 관계자는 “기업 악성 재고가 늘면서 특히 휴대폰과 노트북, 스마트TV 같은 전자제품 재고 인수 문의가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물가 인상으로 실질 가처분 소득이 감소한 소비자들이 가전제품 같은 비필수재 구입을 줄이는 추세여서 앞으로 재고 해소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DSCC는 “경기 침체에 대비해 전 세계 제조·유통업체가 재고 줄이기에 주력하고 있어 앞으로 산업 가동률이 급격하게 둔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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