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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도쿄 시부야의 복합 상업 시설 ‘시부야 스트림’을 걷던 중, 강렬한 진홍색 바탕에 ‘이이치코 디자인 위크 2024′라고 쓰여진 대형 포스터를 발견했다. 일본에선 보리 소주의 산와(三和)주류와 고구마 소주의 기리시마(霧島)주조를 투 톱으로 꼽는데, 산와주류의 대표 브랜드가 ‘이이치코’다. 반가운 마음에 행사가 열리고 있는 시부야 스트림의 이벤트홀을 찾았다. ‘지금까지의 이이치코, 지금부터의 이이치코’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1958년 오이타현에서 탄생한 산와주류는 1979년 이이치코란 브랜드를 론칭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이치코란 단어는 ‘좋다’란 뜻의 오이타현 사투리다. 우리로 치면 ‘좋~구먼’ 정도랄까. 친근감 있는 브랜드 덕분에 지역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그러나 전국적 지명도를 얻기 위해선 도쿄 진출이 필수다. 그러려면 TV 광고도 해야 한다. 지방 소주 회사의 자금력으론 언감생심이었다.
이때 산와주류는 가와기타 히데야(河北 秀也) 도쿄대 명예교수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가와기타 교수는 1972년에 도쿄 지하철 노선도를 만든 사람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노선이 복잡해졌지만, 노선도의 기본은 바뀐 게 없다. 그는 1974년 도쿄 지하철 매너 시리즈 포스터를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포스터에 관한 한 일인자임에 틀림없다.
도쿄 진출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산와주류는 가와기타 교수와 함께 지하철 포스터 광고를 제작하기로 한다. TV 광고에 비해 노출도는 떨어지지만, 그만큼 비용도 적게 든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달에 하나.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 별도로 하나. 연간 13장의 포스터를 만들었다. 1984년에 시작한 이 포스터 제작은 놀랍게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제작된 포스터가 500종이 넘는다. 포스터 자체가 살아 있는 역사인 셈이다.
초창기 포스터는 제품과 브랜드를 부각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지난달 나온 포스터를 보자. 고풍스러운 돌담과 그 위에 자란 초록 식물들을 배경으로, 중앙에 ‘오늘도 지나가는 하루’라는 문구가 수직으로 적혀 있다. 일상의 평온함이 밀려오는 느낌이다. 소주병도 초록색이라 거의 보이지 않는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굳이 제품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이벤트홀 전시 공간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구역은 ‘이이치코를 만나다’. 가로 1.4m, 세로 1m의 대형 포스터가 40개 걸려 있다. 40년간 제작된 포스터 중 대표작을 고른 것이다. 일본 사람이라면 ‘아하, 본 적이 있네’라며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둘째 구역은 ‘이이치코를 알다’. 브랜드의 유래가 사투리라거나, 서민에게 나폴레옹 코냑을 마시는 느낌을 주어 ‘서민의 나폴레옹’이라 불린다는 등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의 패널 40장이 걸려 있었다. 셋째 구역은 ‘이이치코를 체험하다’. 다양한 술은 물론, 모니터를 통해 영상으로 포스터를 즐길 수도 있다. 어두운 조명과 적당히 분위기 있는 음악이 분위기를 북돋운다. 전시장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지만, 주인공은 마흔 살이 된 포스터임을 실감했다.
가와기타 교수는 포스터 제작을 위해 연간 1~2회 해외를 찾는다. 루마니아 출장에선 영양실조에 걸릴 뻔한 경험을, 파타고니아에선 얼어버린 도로에서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브랜드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피하지 않았다. 산와주류 측도 가와기타 교수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포스터가 나온 다음에야 ‘아, 이번 포스터는 저거구나’라고 알 정도였다.
제품의 품질은 제조업자의 손에서 나오지만, 그 제품의 브랜드는 크리에이터의 머리에서 나온다. 이이치코 브랜드는 40년간 차곡차곡 힘을 축적해 만들어졌다. 역시 탁월한 브랜드는 기발함이 아닌 우직함이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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